좋은 와인을 완벽한 상태로 서브하는 일은 좋은 와인을 완벽한 가격에 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페어링할 음식부터 온도, 날씨, 품종에 어울리는 잔과 함께 마시는 이들의 컨디션까지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마시기도 전에 지쳐버리기 일쑤다. 와인의 섬세한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낸 뒤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핥아보듯 음미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그냥 ‘맛있게’, ‘시원하게’, ‘재밌게’ 마시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와인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맞다. 대중적인 와인을 골라 뽕! 따서 신나게 들이붓는 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기분을 더 내고 싶다면 와인에 ‘불순한 요소’들을 조금 첨가해보는 것도 괜찮다. 포도 외의 재료로 만든 술을 섞거나, 아예 과일을 퐁당퐁당 빠뜨려보자. 내킨다면 살짝 얼렸다가 휘리릭 갈아버려도 좋다. 와인 본연의 아로마를 학살하는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글쎄, 조금 다른 의미에서 재밌는 페어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1. 키르(Kir)
클래식부터 시작해보자. 주류를 함께 파는 프랑스의 여느 카페에 항상 준비되어 있는 대표적인 칵테일이 바로 ‘키르(Kir)’다. ‘빈속에 술 마시면 안 된다’라고 배워온 한국인들 눈에는 조금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프랑스인들은 본격적인 식사 전 가벼운 술로 입맛을 돋우는 아페리티프를 즐긴다. 뉘엿뉘엿 해가 떨어지는 시간, 테라스에 모여 앉아 짭짤한 과자나 올리브 정도의 간단한 안주를 곁들여 마시는 한 잔. 무겁고 진득한 술보다는 상쾌하고 가벼운 스타일이 어울린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석양을 닮은 영롱한 붉은빛까지 뽐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식전주가 바로 ‘키르’, 알리고떼로 만든 화이트 와인과 크렘 드 카시스(Crème de Casis/블랙 커런트 리큐어)를 섞은 칵테일이다.
‘키르’라는 이름은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부르고뉴 지역 디종 시의 시장이었던 펠릭스 키르(Félix Kir) 신부에게서 유래했다. 그렇다면 그가 알리고떼 와인과 크렘 드 카시스를 섞어 마신 최초의 인물일까? 그렇지는 않다. 디종에서는 키르라는 이름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키르를 마셔왔다. 20세기 초반, 한 디종 시장이 비용 절감을 이유로 공식행사에 샴페인 대신 키르를 내놓기 시작했고, 이 전통을 펠릭스 키르가 시장이 된 후 이어받은 것. 이 술이 그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영웅이기도 했던 그의 명성에 힘입어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과일 리큐어가 그렇듯, 크렘 드 카시스 역시 끈적하고 달콤하다. 반면 알리고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은 드라이하고 산도가 높다. 이 상반된 두 액체가 만나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키르의 매력이다.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잔에 크렘 드 카시스를 먼저 따르고, 그 위에 알리고떼 와인을 부어 잘 젓는다. 음료가 전체적으로 투명한 붉은색을 띠면 그대로 마시면 된다. 기념할 만한 일이 있다면 와인을 샴페인으로 대체해도 좋다. 그 이름도 호화로운 ‘키르 루아얄(Kir Royal)’이 된다.
키르를 만들 때 주의할 점은 딱 두 가지. 우선 크렘 드 카시스를 너무 많이 넣으면 와인의 신선함을 해칠 수 있으니, 전체의 20% 이내로 양을 제한하는 것이 좋다. 약간의 달콤함으로 알리고떼 품종의 날카로움을 둥글게 만들어 줄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리큐어의 양이 많아지면 알코올 도수도 높아져, 식욕을 자극하고 대화를 이끌어낸다는 식전주 본래의 목적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또한 반드시 알리고떼 품종의 와인을 사용할 필요는 없지만, 오크 풍미가 압도적이거나 아로마가 복합적인 와인은 크렘 드 카시스와 충돌을 일으킬 수 있으니 피하는 것이 좋다. 오크 숙성을 거치지 않은 마을 단위 샤블리를 비롯, 산도가 높고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이라면 알리고떼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2. 프로제(Frosé)
로제는 남프랑스의 찬란한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엷은 핑크색 외양과 신선하고 가벼운 아로마가 바캉스에 더없이 어울리니까. 실제로 랑그독 루시용과 프로방스 등 남프랑스 와인 생산의 상당한 비중을 로제가 차지하고 있다. 주로 마시는 계절이 여름이기도 하거니와, 로제 특유의 산뜻한 맛을 살리려면 화이트 와인 못지않은 충분한 칠링이 필요하다.
기록적인 폭염이 몰아쳤던 재작년만큼 더울 거라는 올여름엔 로제를 아예 얼려버리면 어떨까. 프로즌 마가리타에 대적하는 파티 음료로 프로즌 로제, 그러니까 ‘프로제 Frosé’를 만들어 보자는 얘기다. 이번에도 간단한 레시피다. 설탕 1/4 컵과 물 1/4을 넣고 약한 불에서 저어가며 녹여 설탕 시럽을 만든다. 시럽을 실온 정도로 식힌 뒤 미리 차갑게 해둔 넉넉한 크기의 컨테이너에 붓고, 로제 한 병을 더 해 잘 섞는다. 이제 이 혼합물을 냉동실에서 살짝 얼린 뒤 블렌더로 갈아주면 완성. 차가운 잔에 담으면 시원함이 배가된다.
3. 파인애플 상그리아(Pineapple Sangria)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와인 칵테일은 아마도 상그리아일 것이다. 빠에야와 감바스 알 아히요 등 스페인 음식이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와인에 과일과 주스, 리큐어를 더해 만든 상그리아의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코로나의 기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을 듯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동남아 여행도 당분간은 불가능해 보이니, 올해는 클래식한 버전 대신 열대 풍미 가득한 파인애플 상그리아를 만들어 울적한 마음을 달래보자.
파인애플 반 개, 파인애플 주스 반 컵, 원하는 알코올 함량에 따라 럼 반 컵에서 한 컵, 기대하는 달콤함의 정도에 따라 드라이하거나 스위트한 화이트 와인 한 병, 레몬즙 1/4 컵을 조리대 위에 올렸다면 파인애플 상그리아를 만들 준비는 끝났다. 향긋함과 톡 쏘는 맛을 더해 줄 바질과 탄산수까지 있다면 더 좋긴 하겠지만.
만드는 과정은 클래식 상그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파인애플을 조각내어 (준비했다면) 바질 줄기와 함께 병에 담는다. 나머지 액체 재료를 모두 붓고 섞는다. 바로 마시면 신선하고, 하룻밤 묵히면 잘 어우러진 맛을 즐길 수 있다. 키르나 프로제에 비해 준비물이 너무 많다고? 그만큼 화려한 비주얼을 보장할 테니, 본격적인 여름 파티에 활용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