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는 어떻게 빈티지 와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나.
보르도에서 빈티지라는 개념은 지난 수년 동안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일종의 집착이 되었다. 그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게 크고 복잡한 지역으로 향하는 단순한 경로가 된다는 것이 모두에게 편리하기 때문이다.
해양성 기후로 인해 생산자들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해마다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른다. 그리고 와인상들은 수천 곳에 달하는 와이너리와 수십 가지 테루아가 가득한 지역 내에서 시장에 내놓을 간단한 메시지를 갖게 되어 기뻐한다. 설사 그들이 변화하는 기후 환경에 획일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다섯 개 등급으로 쉽게 나누어 놓은 1855년 등급 분류처럼 서로 다른 빈티지의 매력을 판매하는 건 똑똑한 동시에 아주 강력한 방법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샤토들이 최고의 해에 최고의 구획에서 난 와인만 병입해 팔았다. 나머지 와인은 대량으로 네고시앙에 넘겼고 그러면 그들은 그것을 자사 이름으로 라벨을 붙이고 병입하고 블렌딩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연도를 밝히지 않은 채 팔았다.
당시 보르도의 빈티지라는 개념은 샴페인이나 포트와 비슷했고 이것은 훌륭한 품질이 반영된 것, 매년 볼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보르도의 진정한 역사가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장 클로드 베루에를 만나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예측불허한 해양성 기후를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으로 JP 무엑스에서 일하며 50년 가까이 보르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와인을 만들었고, 몽타뉴 생테밀리옹의 비유 샤토 생 앙드레에서의 개인적인 업적은 와인 양조와 관련된 많은 기록 및 기억과 함께 19세기로 거슬러가는 무수한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언제나 이곳을 찾을 때면 행복해진다. 그의 응접실은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그대로다. 따뜻하고, 나를 환영하는 것 같고, 책과 가족사진으로 북적거리지만 몇몇 예술 작품들은 이곳이 일반적인 가정하고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해준다.
“특정 연도는 역사적인 이유로 병입 되었습니다. 그래서 1945년에는 거의 모두가 병입을 했죠. 전쟁이 끝난 해였으니까요. 좌안에서는 특히 좋은 해였고 무통은 훌륭한 해에 역사적인 와인에 역사적인 라벨을 붙여 병입했다고 인정받았어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물자가 부족해 병 모양이 제각각이지요.
반대로 1946년 와인은 찾기가 극도로 힘들어요. (우연찮게도 그 해는 크리스티앙 무엑스가 태어난 해다) 이 빈티지는 상대적으로 덜 좋았고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없어서 샤토들이 애써 병입하지 않았거든요.” 그가 내게 말해주었다.
20세기 최고의 연속적인 빈티지라고 할 수 있는 1947, 1948, 1949, 1950도 마찬가지였다.
“모범적인 수확이 계속되었어요. 오늘날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반응이 엄청날 겁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연속된 두 번의 빈티지에 관심을 보일 사람이 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지 않았어요. 그래서 많은 샤토들이 1947을 병입하고 – 우안, 특히 슈발 블랑과 페트뤼스가 아주 좋았다 – 1948년에는 쉬었어요. 그 해도 대단히 훌륭한 빈티지였는데도 말이지요.
그것을 그냥 네고시앙에 팔았어요. ‘뱅 밀레지메’를 2년 연속으로 살 고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이것은 1949년에도 이어졌는데, 폭염이 찾아와 숲에 큰불이 나고 8월에 레 랑드까지 퍼졌지요. (80명 넘게 죽고 52,000헥타르에 달하는 소나무숲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밭은 매우 풍요롭고 품질이 좋아 모두가 충분한 양의 와인을 병입했어요. 운이 좋으면 요즘에도 이 빈티지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1950년에 또 한 번 품질 좋은 수확이 이루어지자 다시 한 번 아무도 병입하지 않았어요.”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보물을 놓쳤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것은 곧 과거에는 빈티지가 품질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샹파뉴 같은 지역에서 여전히 그렇듯 말이다. 베루에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품질 좋은 와인을 사려고 할 때 동네 와인 가게에서 ‘포이약 밀레지메’나 ‘생 쥘리앙 밀레지메’를 청했던 것을 기억한다. 특정 와이너리는 물론이고 특정한 연도를 지칭하지도 않고서 말이다.
구체적인 연도가 특출함의 표시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성과 특징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뀐 건 샤토의 병입이 훨씬 더 시스템화된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였다. 지구 온난화를 제쳐 놓고, 어쩌면 이것이 한 세기를 풍미하는 빈티지들이 이번 세기보다 지난 세기에 더 적었던 이유가 아닐까.
1970년대에 들어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석유 파동으로 인해 많은 네고시앙들이 파산했고, 이는 곧 많은 와인을 사들일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샤토들은 자신의 와인을 병입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보르도에서 병 숙성할 수 있는 레드 와인을 점점 더 많이 만들어내기 시작한 시점과도 일치한다)
이때부터 빈티지는 한 해의 지문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는 곧 품질에 더 다양성이 커지고 기후가 더욱 중요해졌다는 뜻이었다. 또한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품질이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샤토가 매년 빈티지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다면 품질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82년까지는 외부적인 압박이 덜했어요. 해리 워흐 같은 와인 전문 작가들은 상대적인 품질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점수 같은 것도, 경쟁도 없었고, 어떤 빈티지의 어려움에 맞설 때면 와인메이커들끼리 힘을 합쳤어요. 하지만 로버트 파커가 도입한 100점 체계는 경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매년 달라지는 상황과 기후의 조건 속에서 와인을 제대로 이끌어가는 건 점점 더 개인적인 도전이 되었어요.” 베루에가 말했다.
오늘날에는 빈티지가 품질뿐 아니라 와인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개념이 널리 퍼져 특정한 해에 병입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리는 샤토들은 보기 드물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긴 하고, 그것도 2013년처럼 두드러지게 실망스러운 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17 빈티지의 서리가 가져온 부작용 중 특이한 점이 있다면 병입하는 것보다 대량으로 판매하는 데서 더 큰 수익을 얻은 샤토들이 갑자기 많아졌다는 겁니다. 우안의 경우 특히 더 그랬죠. 극도로 수확량이 적어 벌크 와인 값이 두 배로 뛰었고, 생테밀리옹 전역에서 품질이 좋지 못해 와이너리 내에서 병입하는 데서 부가가치를 얻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컨설턴트 토마 뒤클로가 최근 내게 해준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조차 샤토가 “있잖아. 올해엔 건너뛰어야겠어.”라고 혼잣말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걸 상기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