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는 골목을 다녀야 한다. 대저 홍콩의 보드라운 속살은 골목 안에 있다. 대로변만 걷는 것은 홍콩의 숨결을 놓치는 바보 같은 짓. 부디 홍콩에서는, 구글지도 찾느라 애쓰지 말고 골목 골목을 여유있게 걸어보시길. 생각지도 못한 보물 같은 장소를 발견하게 될지니.
홍콩 케네디 타운(Kennedy Town). 어느 평일 나른한 저녁, 와인이나 한잔 할까 하고 동네를 기웃거리는데 평소 못 보던 레스토랑이 눈에 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픈 키친 위에 놓인 엄청난 두께의 스테이크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얼핏 봐도 끝내주는 두께에, 로즈마리와 갖가지 허브 양념을 올린 두툼한 스테이크. 뭔지 모르게 아늑하게 느껴지는 공간. 새로 오픈한 곳 같아 유난히 호기심이 갔다. 오픈 키친 너머로 보이는 셰프의 현란한 손놀림. 참새가 방앗간을 거저 지나랴.. 결국 한 블록을 빙글 돌고나서야 오늘 저녁의 종착지를 이 곳으로 정했다.
셰프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과 비주얼에 놀라 멍해져 있을 때 즈음,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점원이 미소로 다가왔다. “잡아먹지 않아요- 일단, 앉아요. 메뉴 설명해드릴까요?” 메뉴를 읽어보니 이탈리아어다. 주변에선 온통 이탈리아어가 오고간다. 퇴근길 들른 이탈리아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와인 한 병, 맥주 한 병씩을 앞에 두고 유쾌한 수다 중이었다. 오늘 이탈리아 사람들 반상회 열리는 날인가? 그랬다. 여기는, 홍콩 거주 이탈리아인들의 작은 아지트였다.
메뉴는 매일 바뀐다고 한다. 오늘의 메뉴는 소고기, 양고기, 닭고기, 참치, 랍스터 요리, 그 외에 탈리아텔레 파스타와 돼지찜, 문어 감자 샐러드, 버팔로 모짜렐라 치즈와 구운 토마토 등. 와인 리스트는 피노그리지오, 샤르도네, 몬텔푸치아노 다브루쪼, 끼안띠였다. 생각보다 와인 리스트가 많지 않아 점원에게 물었다.
“와인 리스트 늘릴 생각 없어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사실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데….. (목소리를 낮추며) 우리 셰프가, 와인이 들어오는 족족 마시거든요. 그래서 저것밖에 안 남았어요.” 그래, 내가 그 마음 잘 안다..“그리고 셰프 친구들 한 번 오면, 와인이 한꺼번에 동이 나거든요. 와인을 팔 수 없는 날도 있어요.”
오늘 저녁은 버팔로 모짜렐라 치즈와 구운 토마토, 그리고 양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하기로 했다. 와인은 몬텔푸치아노 다브루쪼. 그런데 점원은 와인잔이 아닌 물컵에 와인을 따라주는 것이 아닌가? 대체 와인을 왜 물컵에 따라주느냐는 나의 질문에 해맑은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와인 마시면 흥분해서 와인잔을 엄청 잘 깨거든요. 예전에 와인잔을 써보긴 했는데, 일주일 만에 17잔이 깨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물컵을 쓰고 있죠. 이탈리아에는 원래 와인잔 없이 물컵 쓰는 레스토랑도 많아요. 그리고 물컵에 마시면 더 맛있답니다.” ‘그럴 리가’라는 듯한 내 표정에 그는, “더 벌컥벌컥 마실 수 있거든요”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아름답고 고상한 와인잔이 무슨 소용이랴. 그토록 맛깔스러운 음식과 풍미 좋은 와인이 눈앞에 있는데. 이탈리아 와인은 이탈리아 음식과 함께일 때 그 진가를 드러낸다. 이탈리아 와인을 단독으로 마시면 높은 산도에 당황할 수 있지만, 이탈리아 음식과 함께라면 놀라운 맛의 향연, 번쩍이는 불꽃놀이,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경험할 수 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필요한 건 화려한 와인잔이 아니라, 다만 끝내주게 맛있는 요리일 뿐이니까. 그들에겐, 맛있는 요리와 와인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흥겹게 마시는 것이 전부일테니까 말이다.
드디어 식탁에 음식들이 올라왔다. 모짜렐라 치즈와 토마토의 궁합은 언제나 옳지만, 이 요리의 백미는 토마토와 치즈 밑에 숨겨진 빵이다. 소스가 촉촉이 스며들어 빵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렸다가 먹으라는 말에, 와인 한 잔을 마시며 기다렸다. 촉촉이 소스가 배인 빵을 모짜렐라 치즈와 토마토, 선드라이 토마토와 함께 올려 먹은 순간 난 “델리지오쏘!”를 외치고 말았다. 부서질듯 촉촉한 빵은 먹기 아까울 정도다.
양고기 스테이크를 먹어본 적 있는가? 양고기는 특유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온갖 향신료로 양념하고 바짝 익혀 먹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중국식 양꼬치가 그 예다. 그래도 여전히 냄새가 남아있거나, 향신료의 향 때문에 양고기 고유의 맛이 사라지기 일쑤다. 하지만 좋은 육질에 부드러운 양고기를 쓰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냄새를 제거하기 위한 매리네이드 과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뿐. 양고기 맛을 해치지 않는다. 입에서 살살 녹는 양고기는 부드러움과 육질이 최고급 소고기 스테이크 못지않으며, 맛과 텍스쳐는 훨씬 섬세하다. 과한 양념 없이 이토록 깔끔하고 냄새 없는 양고기 스테이크라니! 셰프의 양고기를 고르는 안목과 날카로운 칼질이 그의 오래 쌓인 내공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양고기 스테이크와 찰떡궁합은 역시 레드와인이다. 미디엄 바디에, 탄닌은 부드럽고, 과실 향이 좋은 걸로 선택하기를 추천한다. 이탈리아 바롤로나 나파벨리 카베르네소비뇽 같은 풀바디 와인보다는, 말벡이나 시라 품종의 미디엄 바디 와인이 좋을 것 같다. 나는 Villa Medoro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를 곁들였는데, 산도가 조금 높고, 풍미가 단순하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행히 평일 저녁은 그리 붐비지 않았다. 테이블이 많지 않아 금방 자리가 없어질 것 같은 작은 공간이다. 대신, 요리하는 셰프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고, 친절한 점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오픈 키친 앞자리는 마치 공연장의 좌석처럼, 관객이 공연을 관람하듯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일행과 바(bar)에 앉듯 옆으로 나란히 앉아야 한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차 익숙해졌고, 곧 괜찮은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오는 순간, 문득 한 편의 공연을 보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 이름은 만지아레(Mangiare), 이탈리아어로 ‘먹다’라는 뜻의 단어다. 셰프인 루카(Luca)를 루카 여자친구의 어린 여동생이 부르던 별명이라고 한다. 매일 부엌에서 맛있는 걸 해주니, 루카를 볼 때마다 맛있는 것이 생각나 ‘먹다!’라고 불렀나보다.
만지아레(Mangiare)는 2015년 1월 즈음 문을 열었는데, 사정상 가게 문을 닫았다가 최근 다시 오픈했다. 정해진 메뉴 없이 매일 신선한 재료로 셰프 루카가 전통 이탈리아 음식을 준비한다. 이탈리아 스트릿 푸드(Italian Street Food)가 모토다. 그래서 복잡한 요리법을 쓰지도 않고, 주방도 아담하다. 매일 매일 공수하는 새롭고 신선한 재료에 방점을 둔다.
셰프 루카(Luca Piaza)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나 15살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전통요리는 물론, 19살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퀴진을 배웠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수석 셰프로 일하다, 다시 제노바로 돌아와 육류 손질와 요리에 심취했고, 레드와인 페어링에 빠졌다. 이후, 소믈리에로 일하다, 붓쳐샵(Butchur Shop)을 차렸다. 7년간의 붓쳐샵을 뒤로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레스토랑 컨설턴트로 일하며 10여 개의 레스토랑 오픈에 참여했고, 이후 마카오 더베네치안(The Venetian) 호텔 셰프로 있었다. 몇 년 후, 홍콩으로 건너와 정통 이탈리아 레스토랑 만지아레(Mangiare)를 친구 2명과 함께 케네디타운에 열었다.
Shop no.4, G/F, 45-55 Cadongan Street, Kennedy Town, Hong Kong.
https://www.mangiarehk.com
info@magiarehk.com
every day from 7:30 pm. till 10:30 pm.
주말은 단체손님과 프라이빗 파티(Private Party)가 있을 때가 많다고 하니 확인해보고 가길 권한다. 다시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간판이 없다. 잠깐 쉬는 사이에 누가 간판을 떼어갔기 때문이란다. 홈페이지에 있는 전화번호는 아마 없는 번호라고 나올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다만, 홈페이지에 있는 페이스북, 이메일로 연락 가능하니 참고하길 바란다. 딱히 뒷골목에 위치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찾기 쉬운 곳도 아니니 위치 확인은 필수다. 메인요리 가격은 200-300 HKD 정도. 와인도 비슷한 가격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