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원고를 보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며칠간 마시자의 글들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와인의 이야기가 많군. 술에 관한 이야기라면 자신 있는데, 와인, 와인이라니. 와인은 내가 제일 취약한 부분이다. 물론 마시자 매거진이 와인만을 다루는 매체는 아니다. 하지만 일단은 시작이니까, 그리고 다른 분들이 와인 이야기를 주로 써 주셨으니까 나도 이쪽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중에는 칵테일 이야기를 주로 쓰게 되겠지만 말이다.
자랑스럽게 말할 것은 아니지만 사실 나는 와인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이거 어쩌지. 도저히 쓸 게 없는데, 라는 찰나에 보드카가 나를 구원했다. 그래, 나는 와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포도, 그것도 와인의 재료로 쓰이는 위니 블랑으로 만든 보드카, <시락>에 대해서는 좀 아는 편이다. 그래, 그러니 시락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2003년, <시락>이 발매되었다. 꼬냑 지방의 위니 블랑과 가이약 지방의 모작 블랑을 원료로 5중 증류해서 만든 보드카인(현재는 위니 블랑만을 사용한다) 시락이 발매되자마자, 유럽에서는 보드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농담이나 은유가 아니다. ‘보드카 전쟁 Vodka War’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현실 세계의 일이다. 물론 총칼을 들고 싸우는 구식 전쟁은 아니었다. 유럽 연합 의회를 무대로, 세계의 정치가들과 주류 산업가들이 일으킨 언어의 전쟁이었다.
나나 이 글을 읽는 당신들이 ‘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이 문제는 보드카를 자랑하는 동유럽 국가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다. 8세기에 증류기가 발명된 이래로 폴란드와 러시아 등지에서는 곡물을 증류하여 이 ‘보드카’를 만들어 마셨다. 그들에게 보드카란 동유럽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이 함께하는, ‘곡물로 만든 증류주’였다. 그런데, 저기 어디 와인이나 마시던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익숙한 ‘포도’라는 재료로 이상한 술을 만들고 그걸 ‘보드카’라고 선전하다니. 게다가 그것이 세계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다니. 동유럽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어떤 폴란드 정치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보드카는 곡물로 만든 우리의 전통주다. 과연 프랑스인들이 자두로 만든 샴페인을 샴페인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영국인들은 살구로 만든 위스키를 위스키라고 인정할 것인가? 그런데 저들은 우리보고, 포도로 만든 보드카를 보드카라고 인정하라고 한다. 말이 되는 일인가?’
유럽 연합 의외는 난장판이 되었다. 보드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보드카로 인정해야 하는가? 민족의 자긍심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고, 브랜딩과 마케팅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세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수많은 논쟁 끝에, 2007년, 독일 정치인 호스트 슈넬하트가 ‘슈넬하트 조정안’을 통해 이 분쟁을 정리하려고 시도했다. 슈넬하트 조정안에 의해, 곡물 이외의 재료를 사용한 보드카는 라벨에 이를 반드시 명기해야 한다. 하여, 엄밀하고 법적인 의미에서, 시락은 ‘보드카’로 분류될 수 없다. 시락은 ‘포도 보드카’가 된다. 물론 당연히 전통적인 보드카에 대한 자부심이 있던 동유럽의 사람들은 이 조정안에 많은 불만이 있었지만 말이다. 자, 그렇게 수많은 논쟁을 잉태한 시락은 발매 직후부터 지금까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포도 보드카가 되었다.
바텐더로서 나는 와인 애호가인 손님들에게 시락을 별로 추천하지 않는 편이다. 셰리의 향이 강한 위스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애호가들은 이미 좋은 와인을 충분히 마셔보았고, 시락에서 나는 포도의 향미나 셰리의 향미가 강한 위스키에서 나는 셰리의 향미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와인은 와인의 길이 있는 것이며, 보드카에게는 보드카의 길이 있는 것이니까. 와인의 향미를 기대하고 시락을 마신다면 분명히 아쉬운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포도로 만든 보드카’의 향미가 궁금하다면 시락은 정말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위니 블랑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파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시락은 정말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화려한 디자인과 산뜻한 단맛을 자랑하는 이 보드카는 정말 기분 좋은 하루를 선사해줄 테니까.
에디터
주영준
작성일자
2016.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