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계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이며, 신세계는 칠레, 호주, 미국, 뉴질랜드, 남아공 등 전통적인 산지 이외의 지역을 말한다는 것을 와인 애호가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와인 양조용 포도의 재배 지역이 다양해지면 결과적으로 와인의 맛도 다양해진다. 같은 품종의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하더라도 지역의 특징에 따라 수확된 포도의 성격은 기존의 재배지와는 다를 것이고 본질적 차이를 거스르고 동일한 맛과 향을 가진 와인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와인 양조자들 역시(비록 구세계에서 이미 성공을 거둔 사람 일지라 하더라도) 변하는 테루아를 반영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연구와 노력을 거듭할 것이고 말이다.
경험이 많은 와인 전문가와 애호가들의 시음 평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평이 나오는데 “이 와인은 올드 월드 스타일로 만든 뉴 월드의 와인이다.”라는 류의 와인 평이 그렇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차이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같은 품종의 포도가 테루아의 차이로 전혀 다른 결과의 와인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기존의 와인 산지가 아닌 지역에서, 토착 품종으로 생산한 와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의 와인들과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게다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유명 산지가 아닌 일본산 와인은 어떨까?
코슈를 이번 기회에 처음 시음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매우 깨끗한 느낌의 얌전한 와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아로마가 있다든가, 맛에서 분명한 캐릭터를 주는 와인은 아니었다. 마침 오키나와 여행의 기회도 있고 해서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코슈를 몇 가지 구해 시음했다.
특화된 와인 샵이라든가, 주류 매장이나 백화점이 아닌 일반 마트에서 판매하는 저가의 코슈를 구매하고 시음을 했는데 보편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와인을 최우선의 목표로 잡았고 음식과 마리아주에 포인트를 두었다.
코르크 오픈 후 첫 향은 숙성 샤르도네와 드라이 리슬링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이는 아로마가 좋았다는 결론인데 숙성한 과일 향의 여운이 생참치와 만나면서 입에서는 감칠맛으로 바뀌었다. 미약하나마 타닌도 느껴지고, 여운이 짧지 않게 유지돼 개성이 도드라지지 않지만 깨끗한 술이라는 기존의 이미지가 바뀌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처음 느꼈던 달콤한 과일 향은 컵에 와인을 따르는 순간 공기와 섞여 사라져 버렸다. 이날 처음 코슈를 맛본 남편의 제의로 코슈 시음이 이번 여행의 또 다른 미션이 되기도 했으니 코슈에 대한 첫인상이 꽤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술의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시음 온도라는 것은 와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과연 같은 와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경우도 있다.
우선 첫 시음 때와는 다른 실온 보관 중에 마셨고, 적당히 숙성된 생참치와는 다른 활어회와 매칭한 코슈는 와인이라기보다 향이 좋은 사케의 느낌이 강했다.
첫 시음에서 숙성된 과일의 향이라고 느꼈던 단향은 과일의 이미지보다는 누룩의 단향으로 느껴졌고, 숙성 회과 만났을 때 상승했던 감칠맛은 활어회와 만났을 때는 오히려 거슬리는 단맛으로 하락한듯 싶었다. 적정 온도와 맞춤한 음식과의 마리아주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일본 여행에서 사 온 몇 가지 코슈 와인을 맛보고 낸 공통적인 결론은 드라이 와인이라고 할지라도 약간의 단맛이 있고, 산도는 낮다는 점을 발견했다. 산미는 식전에는 침을 돌게 하면서 입맛을 돋우지만 식중이라면 먼저 먹었던 음식의 잔맛을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산도는 화이트 와인의 경우 전체적으로 와인의 활기를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산도가 낮은 편인 코슈의 경우 힘 있고 활기찬 와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부드럽고, 감칠맛을 주는 와인이라고는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풍미가 좋은 샤르도네와 돼지고기구이는 좋은 마리아주를 보인다.
지방의 함량이 높아 고소한 풍미 좋은 이베리코 돼지 등심을 오븐에 구워 코슈 로제와 매칭했다.
굳이 로제를 선택한 이유는 몇 가지의 기대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로제는 레드 와인보다는 화이트 와인와 음용 기준이 비슷하지만 화이트 와인보다 강한 타닌과 향이 있어 보다 건실한 바디감을 느낄 수 있다.
산도가 낮다는 건 비슷했지만 바디감이 일반 화이트보다 큰 만큼 와인 자체의 텍스쳐가 강하게 느껴졌으나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만 이 코슈 로제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매칭한 돼지 등심구이의 풍미를 해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낮은 산도는 입안에 남은 과도한 기름기를 정말 아주 가볍게 닦아주는 역할만 해 주기 때문에 비싸게 산 이베리코 등심구이의 여운을 오래 느끼게 해 주었다는 미덕이랄까? 이것이 코슈의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점은 코슈는(적어도 내가 구입하고 시음한 종류의) 술 하나로 판단을 하기보다 반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술이라는 점이다. 단지 와인만을 두고 시음을 했다면 낮은 산도와 정돈되지 않은 듯한 알코올의 기운 등으로 밸런스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결론을 냈을지도 모르겠다.
간혹 잊을 때가 있긴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와인의 기원을 따져본다면 와인도 결국엔 전통주라는 점이다. 즉 한 지역에서 지역색을 띠며 그 지역의 밥상 문화와 상호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왔다는 점인데 물론 와인이 산업화하면서 시장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기준으로 맛의 변화가 생겼을 수는 있겠으나 지금도 여전히 통용되는 최고의 마리아주는 지역의 전통 음식과 그 지역 와인의 매칭이라고 말을 한다. 나 역시도 겨울이면 깨끗한 샤블리와 레몬즙만 뿌린 싱싱한 통영 굴을 즐기는데 그러면서도 샤블리에서 먹는 이런 매칭은 얼마나 더 환상적일까를 상상하곤 한다. 그뿐만 아니라 바롤로와 이탈리아 북부의 야성적인 스테이크가 만나면 어떨지 싶은 기대를 품고, 더운 날 시원하게 칠링된 까바와 스페인 노천에서 무심하게 손으로 집어 먹는 타파스가 줄 시크한 낭만도 가슴에 꿈처럼 품고 있다. 이래서 나는 부유한 무병장수를 꿈꾼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특징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나라가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잘하는 점이 ‘남의 것을 내것화’ 하는 능력이다. 과장을 더 해서 결론을 얘기하자면 나는 사진의 코슈에서 일본을 봤다.
음용 온도보다 높은 온도에서 마시게 된 코슈에서 사케의 향의 느낀 적이 있었지만, 이것이 와인을 닮은 사케인지, 사케를 닮은 와인인지를 고민하게 한 코슈는 ‘善(zen)’이라는 이름을 가진 코슈가 최고였다. 맛을 본 후 깨달았지만 이름에서부터 생산자의 의도가 드러난다. 지극히 일본적인, 사케의 성격을 복사하듯이 옮겨 놓은 코슈였다.
와인을 기대하고 마신다면 누룩 향으로 인해 이렇게 맛없는 와인은 세상천지에 없을 것이란 말이 나올 법하다. 이 향이 코에서는 매우 달큰하게 느껴지지만, 막상 입에서는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고 사라지는데 이런 이유로 뭔가 빈 듯한 맛이 나게 하고 와인을 너무 단순하게 만들어 허무하달까 싶은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이 누룩 향조차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변화도 없이 스르륵 사라져 버리고 와인은 약한 산미와 알코올만 남긴 채 맥이 빠져 버린다. 참고로 와인을 남겨뒀다가 다음 날 전복술찜을 할 때 사케 대신 썼더니 아주 좋았다.
개인적으로 볼 때 정말 맛이 없는 와인이긴 했지만, 지역색을 표현한 의미 있는 코슈라는 생각이 들고, 기회가 되면 생산자를 만나보고도 싶게 한 와인이었다.
인터넷에 ‘koshu’를 검색하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코슈가 선토리의 코슈로 이것은 주류 대기업의 힘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맛을 보면 그동안 맛보았던 다른 코슈와는 다른 점은 와인 같다는 점이다. 적어도 선토리의 코슈에서는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다른 코슈들에서 났던 누룩 향이 나지 않았고 분명히 산도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바삭거리는 느낌까지 있다.
코슈를 맛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코슈가 선토리의 코슈다. 일단 낯선 품종에서 오는 거부감이 적기 때문이다.
코슈를 시음하면서 매칭한 음식들은 음식의 간과 향이 세지 않은, 되도록이면 코슈의 여린 특징을 해치지 않는 음식들로 마리아주를 준비했다. 선토리의 매칭 음식 또한 그랬다.
선토리 사의 코슈는 한 마디로 매뉴얼에 맞게 만들어진 와인이었다. 청량하고, 소박하지만 밝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와인이었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샤블리와 그뤼너 벨트리너를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미네랄리티가 느껴졌고, 발랄함이 느껴지는 산미도 느껴졌지만, 와인의 전반적인 느낌은 얌전하고, 고요한 느낌이었다. 심심할 듯 하지만 한 번 생각하고 나야 웃길 농담을 하는 사람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졌달까?
네 가지의 코슈를 시음하면서 느낀 평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코슈는 반주의 성격이 강한 와인이었다. 코슈 그 자체로는 선명한 인상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산 와인이라는 스토리와 얌전한 음식들과 매칭했을 때의 반주로서의 가치는 코슈가 가진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와인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 코슈를 들고 나간다면 아마도 코슈를 주제로 한 흥미로운 얘기들이 오랫동안 오가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한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이유와 계기로 와인을 좋아한다 하겠지만, 와인 애호가들의 공통적인 와인 사랑의 이유는 대화를 이끌어내는 술이라는 점을 꼭 든다. 어떤 이야기든 삶의 활력을 줄 수 있는 소재들이 와인과 엮이고 엮기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운 대화의 장을 열어 주는 매개가 된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실 코슈는 그동안 익숙하게 마셔왔던 지역의 와인들에 비하면 매우 낯선 맛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전에는 없었던 ‘코슈’라는 단일 품종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듯한 특징을 가진 와인이라는 점에서는 무궁무진한 대화 소재를 만들어내는 와인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올해도 딱 두 달 반만을 남겨 놓은 요즘은 와인 한잔 하면서 무거운 얘기는 다 걷어내고, 절대로 건설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100% 잡담을 하면서 속없이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올해가 가기 전에 그런 때가 오려나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