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여행 중에 나파 밸리 와인을 마실 사람이 과연 있을까? 칠레에서 굳이 이탈리아 와인을 찾을 사람은? 로컬 음식과 음료를 소비하는 데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신선하거나 안정된 상태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물론, 구하기도 쉬우며 비교적 저렴하고 환경적 영향도 덜하다. 와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조건은 있다. 현지 상품의 선택지가 다양하고 퀄리티가 만족스러울 것.
그런 면에서 동북아시아의 와인 애호가들은 운이 좋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인도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와인을 생산하고는 있지만 다양성 면에서나 퀄리티 면에서나 주요 와인 생산국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으니까. 하지만 최근 들어 몇몇 아시아 국가의 와인 산업이 국가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국제 와인 대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동북아시아의 와이너리도 눈에 띈다. 이들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포도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을까?
한국 와인, 베를린와인트로피에서 은상 수상
와인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마주앙’이다. 와인이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세련된 서양식 식문화의 일부로서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저녁 식탁 위에 올라온 화이트 와인은 어린 내 눈에 반짝이는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1977년 동양맥주에서 출시한 마주앙은 해태주조의 ‘노블와인’에 이어 두 번째로 탄생한 국산 와인으로, 출시 후 로마 교황청에서 미사주로 승인받고 생산량이 7~8천 톤에 달할 정도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노블와인과 마주앙은 먹을 곡식도 부족했던 시기, 다량의 쌀과 보리가 양조에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국민주개발정책’이라는 이름하에 와인 생산을 주도한 결과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와인의 범주에는 들지 않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훨씬 오래전부터 포도로 술을 빚어왔다. 『수운잡방』, 『지봉류설』, 『유원총보』, 『산림경제』 등 다양한 서적에 700년 전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온 포도주 양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1500년대에 쓰인 『수운잡방』에는 건포도 분말과 백미, 누룩을 사용해 포도주를 빚는 과정이 상세히 나와 있으며, “양주자사(당나라의 벼슬)의 자리도 걸어 볼만하다.”라며 그 맛을 상찬하는 구절도 있다.
그럼 오늘날의 한국 와인은 어디쯤 와 있을까. 199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 충북 영동, 경북 영천, 안산 대부도 등에서 본격적인 한국 와인 산업이 시작되었다(유병호, 이유양 / 한국와인의 미래발전전략에 대한 와인산업종사자들의 주관성 연구: Q 방법론의 적용). 영동에서는 식용 품종인 캠벨을 사용한 레드와 로제, 머스캣 오브 알렉산드리아나 1993년 국내에서 육성된 청수를 활용해 화이트 와인을 양조하며, 영천에서는 주로 머스캣 베일리 A로 레드 와인을, 거봉으로 화이트 혹은 아이스 와인을 생산한다. 무주에서는 야생 포도인 머루를 사용해 와인을 빚기도 한다. 충북 충주에서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는 프랑스인도 있다. 프랑스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던 도미니크 에어케 씨는 한국 소설가 신이현 씨와 결혼 후 한국으로 이주해 머스캣 베일리 A와 머루로 레드 와인을, 청수로 화이트 스파클링을 만들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도 한국 와인이 점차 인정을 받는 추세다. 지난 10월 열린 ‘베를린와인트로피 2021’ 하계 테이스팅에서 영천의 오계리 와이너리와 영동의 시나브로 와이너리가 화이트 와인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아시아와인트로피 2021’에서는 영동의 샤토미소와 시나브로가 각각 골드상을, 갈기산포도농원이 실버상을 거머쥐었다. 아쉬운 부분은 있다. 몇몇 제품을 제외하면 여전히 스위트 와인이 주를 이루고 사과, 감 등 포도 외의 재료로 만든 발효주가 와인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어 국산 와인을 시도해 보려는 소비자들에게 다소 혼란을 안긴다는 점, 기후적 특성 때문인지 레드 와인에서 이렇다 할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충분한 지원과 관심이 있다면 이런 점들도 차차 개선될 테니, 올 연말에는 한국 태생의 와인을 한 병 준비해 보는 것도 좋겠다.
‘와인 굴기’ 중국 와인 어디까지 갈까
중국은 명실상부한 와인 소비 대국이다. OIV(International Organisation of Vine and Wine, 국제와인기구)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국은 2019년에 미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뒤를 이어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와인을 많이 소비한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중국 부호들은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고급 와인을 수집하고, 정부는 와인 관세로 호주를 위협할 만큼 국제 와인 시장에서 입김이 세다. 그럼 중국은 직접 와인을 만들기도 할까? 물론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만드는데, 한해 2억 갤런(약 7억 5천 7백만 리터)를 생산하며 아시아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세계 와인 생산량 10위 안에 들었다.
정부 차원의 화력 지원도 만만치 않다. 호주 와인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한 이후로 자국 와인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해온 중국 정부는 중북부의 닝샤후이족자치구를 ‘제2의 보르도’로 키우겠다고 올여름 공식 발표하며 2025년까지 한해 3억 병, 2035년까지 한해 6억 병의 와인을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에 발맞추듯 고급 바이주로 잘 알려진 주류 업체 마오타이 계열사에서도 고가의 와인을 내놓았다. 한 병당 한화 약 57만 원에 달하는 ‘칭롼 레드 드라이’를 출시한 것. 딱 9999병만 생산할 계획인 칭롼 와인은 그 희소성 덕분에 더욱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 와인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100년 넘게 중국의 대표 와인 브랜드로 사랑받아 온 ‘장위’의 와인들은 2008년부터 3,000여 개 유럽 마트 및 전문점과 5성급 호텔에 입점되었고, 루프트한자의 비즈니스석 주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영국의 와인 전문지 《디캔터》에서 주관하는 ‘디캔터 월드와인어워즈’에서 닝샤자치구의 와이너리 ‘헬란 칭수에(Helan Qingxue, 贺兰晴雪)가 만든 ‘자베이란 2009’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중국 내에서는 유럽 와인에 대한 선호가 여전하지만, 국제 시장에서는 이미 10년 전부터 중국 와인의 가능성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와인 굴기’를 외치는 중국 정부의 지원이 더해지면 10년 후에는 중국 와인의 입지가 어떻게 달라질지 사뭇 궁금해진다.
OIV에 양조용 포도 3종 등록한 일본
일본에 처음으로 유럽식 와인이 들어온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일본을 찾은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이 규슈로 와인을 들여왔고, 일부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17세기 들어 기독교 탄압 및 해외 교역 금지 조치 등으로 주춤했던 와인 수입 및 양조는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1877년 설립된 ‘대 일본 야마나시 포도주’ 회사는 두 젊은이를 유럽으로 보내 포도 재배 및 와인 양조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연구와 생산에 돌입했지만 판매가 저조해 곧 문을 닫았는데, 이를 인수한 미야자키가 1892년과 1904년에 직접 양조장을 건립한다. 이 중 두 번째 양조장이 대표적인 일본의 와인 브랜드 ‘샤토 메르시앙’의 전신이다.
일본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샤르도네 등의 국제 품종도 재배되지만 실크로드를 통해 일본으로 전해진 청포도 ‘고슈’와 1927년 ‘일본 와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와카미 젠베이가 개발한 적포도 ‘머스캣 베일리 A’가 특히 사랑받는다. 감칠맛 강한 일본 음식에 잘 어울리는 이 두 품종은 각각 2010년과 2013년 OIV에 와인 양조용 포도로 정식 등록되었고, 추위에 강한 홋카이도의 적포도 ‘야마사치’도 최근 세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국제 사회에서 일본 와인이 인정을 받기까지 지자체의 노력도 만만찮았다. 고슈 와인의 주산지인 야마나시현은 ‘고슈 와인을 세계에서 인정받는 와인으로’ 만들겠다며 현내 15개 와이너리와 고슈시 상공회, 와인주조협동조합 등과 함께 ‘KOJ(Koshu of Japan)’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들은 EU 기준에 맞추어 와인을 생산하는 것은 물론 유럽 국가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모션을 진행하며 고슈의 OIV 등록에 힘을 보탰다. 지자체와 생산자의 적극적인 협력 덕택일까? 2013년부터는 EU 국가에 와인을 수출할 때 라벨에 ‘야마나시’라는 원산지 명칭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동북아시아 3국의 와인 산업이 점차 발전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세 나라 모두 오래전부터 전통 포도주를 양조했다지만, 현대적 의미의 와인 생산에 뛰어든 지는 50년~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오늘날의 유수의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성과다. 멀고 먼 유럽, 아메리카 대륙의 와인보다도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아쉽다. 와인숍이나 레스토랑에서 자연스럽게 한・중・일의 다양한 와인을 마주치게 될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