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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러버들에게는 미리 크리스마스 정도로 설레는 날이 있다.

와인 러버들에게는 미리 크리스마스 정도로 설레는 날이 있다.

백경화 2016년 11월 29일

와인 러버들에게는 미리 크리스마스 정도로 설레는 날이 있다.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보졸레의 ‘가메’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든 햇 와인이 출시되는 날이 그날이다. 현재는 보졸레 누보가 한국에 소개된 이후 몇 년간 있었던 거품은 거의 사라졌다지만 와인 러버들에게는 지금도 1년에 한 번 있는 신선한 이벤트임이 분명하다. 베리류의 과일 향이 살랑거리는 신선한 와인은 잔에 따라질 때부터 갓 딴 듯한 주이시한 과일의 향이 진동한다. 달콤한 과일 향과 약간의 풀 냄새가 더해져 싱그럽다는 어휘가 가장 어울리는 이 와인은 최소한의 숙성 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아주 가볍다. 술이라기보다는 주스에 가까운 음용감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함과 가벼움. 그리고 신선함. 이 세 가지 외에는 사족처럼 느껴지는 이 와인은 가을에 만나는 봄바람 같은 느낌이다.

보졸레 누보가 가진 이런 신선한 설렘 때문에 2016년 대한민국에서 만나는 보졸레 누보는 보졸레 누보 답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찾아다니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마치 빚을지는 게 아닌가 하는 무거운 마음이 들어 다른 해처럼 와인을 즐기는 여러 사람과 서로 다른 와인 하우스의 와인을 한 병씩 들고 만나 가벼운 가십거리를 안주 삼아 떠들고 즐기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보졸레 누보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벼운 와인인 만큼, 그 해의 햇 와인을 오픈해 마시는 만큼 가볍고 설레는 기분을 가득 안고 흔들흔들 몸이라도 흔들며 마셔야 하는데 말이다. 햇 와인을 혁명의 건배주로, 거사를 모의하는 결의에 찬 독주처럼 마시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일상이 불편해진 2016년의 가을 나는 와인을 사랑하는 이 땅의 국민 1로서 기꺼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소소한 기쁨을 반납하고 결연한 투지를 한시라도 꺼트리지 말아야 할 것인가 잠깐의 탈선을 감행할 것인가? (와인 한 잔 마시는데 이렇게 고민을 해야 하는 현실이 싫다.)

출처 : 오마이뉴스

출처 : 오마이뉴스

매주 이어가는 광화문 광장에서의 촛불 시위. 그리고 지역별로, 마을 단위별로 매일 밤 진행되는 촛불의 물결. 외신들도 놀라는 질서와 평화. 집회 후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고 경찰 차 벽에 대항의 의미로 붙이는 꽃 스티커. 그리고 집회가 끝 난 후 경찰차에 붙은 스티커를 떼는 시민들의 모습. 폭력이 사라진 곳을 채운 것은 시민들의 재치있는 자유 발언과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거리 공연들. 우리의 시위 문화는 벌써 달라져 있었다. 시민들이 모이는 이유는 분노지만 그것은 예술과 재치와 웃음으로 승화되어  마치 대규모의 문화 행사와 같은 진행이 계속되고 있다. 결기는 더욱 강력해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현장의 분위기는 공포가 아닌 뭉클한 감동이 있다. 일부는 목을 죄어오는 것 같은 압박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대다수는 해방감을 느낀다. 이 싸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끝이 날 싸움 같지는 않아 보인다. 매일 뉴스가 새로운 뉴스를 덮고, 이제는 새로 발표되는 뉴스가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을 정도로 충격에 무뎌져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어떤 뉴스는 너무 유치해서 실소가 나기도 하니 시쳇말로 ‘이게 나라냐’ 싶다가도 ‘이게 뉴스냐’ 싶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고 지치지 않고 버텨내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절대로 지쳐서는 안 되고, 절대로 무뎌져서도 안 된다. 시종일관 결의에 차 악으로만 버틸 수는 없다. 긴 싸움을 오랫동안 하려면 즐거워야 한다. 일상이 즐거워야 하고, 그 에너지를 길고 지루한 싸움에서 태워야 한다. 일상에서 누리는 개인적인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고 싸움에만 집중하는 것은 장기전을 위한 전략이라고는 볼 수 없다. 제 것을 포기하기 싫은 궤변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고 억지 논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만 오래되고 거대한 힘에 저항하는 나는 나만의 전략으로 장기전을 치르려고 한다. 힘을 비축해야 필요할 때 쓸 수 있고, 필요한 힘을 쓰기 위해서는 컨디션 관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지난주 집회에 다녀온 한 지인은 힘을 보태려고 집회에 갔는데 오히려 단결되고 응축된 힘을 받고 왔다고 한다. 그 힘으로 일상을 열심히 즐겁게 살고, 또다시 집회에 참석할 것이라고 한다.

 2016 보졸레누보

2016 보졸레누보

와인은 한 병 한 병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2016년 11월의 보졸레 누보는 내게 가벼운 즐거움이 아닌 다소 무겁고 서글프지만 새로운 미래를 위한 과도기의 시간을 의미한다. 나름의 생각이 정리되고 난 뒤 며칠 늦게 벌교에서 난 참꼬막을 삶았다. 남도 여자처럼 살이 오그라들지 않게, 육즙이 빠지지 않게 통통하게 잘 삶았다. 가볍게 날아오르는 과일 향을 가진 자줏빛이 나는 2016년 산 보졸레 누보를 즐겁게 마셨다. 그리고 지치지 않고 길게 싸울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 치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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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화

여행 한 스푼, 와인 한 방울. 즐거운 와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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