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처음 마시기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건 바로 와인의 옷, 라벨을 읽는 일이었다. 발음조차 할 수 없는 글씨가 필기체로 쓰여 있고 크고 작은 단어들이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인터넷에 ‘와인 라벨 읽는 법’을 검색해 정독했지만, 국가와 지역별로 또 다른 해석들에 대한 물음표가 끊이질 않았고 이내 라벨 읽기를 포기했었다. 해석하긴 어렵지만, 와인을 기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 또한 바로 라벨이었다. 독특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와인도, 단순하다 못해 글씨조차 쓰여 있지 않은 라벨도, 맛있게 마신 와인이면 기억이 났고 그렇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와인의 생산자와 포도품종, 와인이 만들어진 상세한 지역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의미 있는 문구가 쓰여 있기도 하고 유명 예술가의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자신의 얼굴이 들어가 있기도 한 다양한 와인의 라벨들. 단순히 해석하다 지쳐 포기해버리기엔 그 속에 숨은 의미가 깊다.
슬픔이여 안녕, 샤스스플린
취하라,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항상 취해 있으라.
술이건, 시건, 미덕이건 당신 뜻대로.
– 보들레르 ‘취하라’ 中 –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슬픔이 느껴지는 가을 앓이 중이라면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와인, ‘샤스 스플린’에 주목해 보자. <악의 꽃>, <파리의 우울>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천재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심각한 우울증을 달고 살았다. 불어로 샤스(Chasse)는 ‘내쫓다’는 의미를, 스플린(Spleen)은 ‘우울’을 뜻해 이름 자체로 슬픔을 쫓아내는 즉,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뜻이 있는 ‘샤스 스플린’은 보들레르가 사랑했던 와인이고 이 와인을 마시고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던 그가 헌정한 이름이라고 한다.
시인인 보들레르가 사랑한 와인이니만큼, 와인의 라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쪽에 빼곡히 적힌 글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매년 다른 시인들의 시구절을 새겨 넣은 것이다. ‘이 와인을 마시는 것은 천 년의 추억을 가지는 것과 같다(J’ai plus de souvenirs que si j’avais mille ans)’라는 보들레르의 시구절이 적힌 와인은 샤토 샤스 스플린 2000년 빈티지에 적혀있다.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로미오와 줄리엣,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리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세기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영화, 소설, 연극 등으로 재탄생하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스무 살 이상의 나이 차, 혼전 임신, 집안의 반대 등으로 중세 유럽을 발칵 뒤집었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안타까운 사랑은 프랑스 남부 론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쉔 블루(Chene bleu)’ 와인에 담겨 다시 탄생했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비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당시 신학자였던 아벨라르의 명성에 흠집이 가는 것이 두려워 홀로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벨라르는 둘의 사랑을 반대한 엘로이즈의 삼촌에 의해 거세당하면서 이 둘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만나지 못한 채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랑을 이어간다.
쉔 블루(Chene Bleu)의 와인 생산자는 그르나슈를 중심으로 블렌딩된 복합적이며 사색적인 와인에는 아벨라르의 이름을 붙인 쉔 블루 아벨라르(Chene Bleu, Abelard)를, 시라를 중심으로 블렌딩된 향기롭지만 정제된 와인에는 엘로이즈의 이름을 넣은 쉔 블루 엘로이즈(Chene Bleu, Heloise)를 만들어 그들의 영원한 사랑을 한병의 와인에 담았다.
쉔 블루, ‘파란 나무’를 뜻하는 이 와이너리의 이름은 2005년 심한 가뭄 피해를 입어 죽은 나무를 프로방스 출신의 나무 조각가 마르코 누세라(Marco Nucera)가 황산구리로 채색하여 파란 오크나무로 탄생, 이 와이너리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내 마음은 칼롱에 있소”
베스트셀러 제품이 있지만 각자 아끼는 제품은 따로 있는 것처럼, ‘샤토 라피트(Chateau Lafite)’와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를 소유한 세귀르 가문의 세귀르 후작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명품 와인보다 아끼는 와인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하트 라벨로 유명한 ‘칼롱 세귀르(Calon Segur)’였다. 당시 세귀르 후작은 “나는 샤토 라피트(Chateau Lafite)와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에서 와인을 만들지만 내 마음은 칼롱(Calon)에 있다” 라고 말하며 이 와인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그의 후손들이 조상의 말을 기리기 위하여 하트 문양이 들어간 라벨을 고안하여 칼롱 세귀르(Calon Segur)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미술관에서 감동을 준 그림의 작가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좋아 음악의 제목을 물어봐 누구의 곡인지 찾아보듯, 꽤 많은 와인이 라벨로 시작해 감동의 맛으로 다가와 내 마음속에 저장되었다. “한병의 와인에는 모든 책보다 더 많은 철학이 있다”라고 한 프랑스 학자 루이 파스퇴르의 말처럼 와인을 만드는 방식만큼이나 다양한 생산자들이 표현한 라벨의 의미를 알고 마시면 그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