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와인의 부활 3 – 중세의 와인 문화와 네덜란드의 부상
유럽의 와인 생산은 1500년부터 1700년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이 당시의 와인 문화를 살펴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다만 와인보다는 맥주가 유럽 전역에서 더 많이 소비되는 주류였다는 것도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다. 값이 와인보다 저렴했기 때문에 서민들이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대나 중세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와인은 다소 특별한 술에 속했다. 즉, 특권층이 서민보다는 자주 접할 수 있었고, 특히 질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한 예로, 지금은 알자스에 밀려 와인을 만들지 않지만, 중세 시대에 알아주던 와인 생산지였던 로렌에 대한 이야기가 로드 필립스의 <와인의 역사>에 등장한다. 로렌을 통치하던 로렌 공은 한 달에 약 7,000리터의 와인을 구매했다고 한다. 물론 그가 다 마신 건 아니고, 그의 휘하의 사람들이 함께 소비했겠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또한 1481년 한 해 동안 로렌 공의 생선 요리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에서 무려 468리터의 와인을 썼다는 기록도 흥미롭다.
사실 영국의 왕 헨리 3세에 비하면 로렌 공의 와인 소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헨리 3세는 그의 딸 마가렛이 결혼을 할 때 무려 25,500갤런(약 10,000리터)에 달하는 와인을 소비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결혼식에 쓴 사슴은 1,300마리, 암탉 7,000마리, 돼지 170마리, 청어 60,000마리, 빵 68,500덩이라고 하니, 이 정도면 하객이 몇 명이었는지 궁금해질 정도. 이와 같은 사례들로 볼 때 중세 시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와인을 즐길 수 있었지만, 확실하게 특권층이 보다 더 자주 그리고 많이 와인을 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간혹 임금의 일부를 와인으로 대신 받기도 했고, 또한 군수품에도 항상 와인이 들어갔다. 이때 지급된 와인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효과도 있었지만, 빵과 함께 목이 마르지 않도록 하는, 주식의 의미가 더 컸다. 이 당시 전쟁 통에는 깨끗한 물을 공급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와인은 필수품이었다. 와인의 알코올은 전염병의 창궐을 막는 훌륭한 방부제 역할을 했던 셈이다.
본격적으로 와인에 대해서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대도시가 형성되고, 왕족이나 귀족만이 와인을 즐기는 시대가 끝이 났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즐기면서 입맛이 까다로워졌다. 특히 영국의 소비자들은 가스코뉴 와인을 매우 즐기면서 그 안에서 나름대로 평가하기를 좋아했다. 때문에 이미 그 시기부터 같은 가스코뉴 와인이라도 지명도에 따라 가격이 달라졌다.
와인 생산 방식이 중요해지고 소비가 점차 늘어나면서 당연히 규제가 따르기 시작한다.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 당시 와인과 관련된 사기 행위는 만연해 있었다. 기본적으로 냉장고가 없던 시기였기에 갓 생산된 와인이 변질되지 않고 그 신선함을 유지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주된 보관 용기였던 나무통은 오래 쓰면 낡고 좀이 쉽게 들었고, 산소와의 접촉도 막을 수 없었기에 1년을 버티는 와인이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이런 변질된 와인들을 버리기 아까워하던 수많은 상인들은 새로 생산된 와인과 오래된 와인을 섞어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에서 여러 가지 규칙을 세웠다. 예를 들어 이 당시 술집 주인들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가운데 하나만 팔 수 있었다고 한다. 정직하게 와인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억울한 처사일 수 있으나,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두 와인을 섞어서 팔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술집 주인은 손님들이 통에서 와인을 따르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셀러의 문을 항상 활짝 열어놨어야 했다. 물론 이런 규칙들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피할 수 있었기에 유명무실하기도 했지만, 간혹 적발되는 주인에게는 영업 정지의 처벌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 당시 발행된 <Le Menagier de Paris>(파리의 가정주부)라는 책도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은 1393년 첫 출판 되었는데, 중세 시대의 프랑스에서 여성들의 현명한 결혼 생활과 가정에 해야 할 여러 일에 대한 노하우와 팁을 전하고 있다. 저자는 14세기에 영주를 보좌하던 기사로, 자신의 아내를 위해 쓴 책이라고 전해진다. 책에는 남편 시중드는 방법, 하인 다루는 방법, 애완견 길들이는 방법, 매의 이를 잡는 방법, 음식과 술을 준비하는 방법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디테일한 부분까지 나열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매주 와인의 상태를 점검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내의 의무 중 하나였다고 한다. 상한 와인을 되돌리는 방법 중, 겨울에 주로 활용하던 것은 와인을 정원에 내놓아 겨울 서리를 맞게 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약간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차가워진 와인이 실온의 와인보다 바로 맛보면 덜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소개된다. 예를 들어 끈적끈적하게 변한 와인을 끓인 후, 튀긴 계란 흰자와 껍질을 넣은 자루에 넣고 매달아 두는 방법. 붉게 변한 화이트 와인은 감탕나무 잎으로 해결하고, 씁쓸한 맛의 와인은 삶은 옥수수로 보완했다고 한다. 지금의 시선으로 봤을 때 다소 허무맹랑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효과가 실제로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 시기에 가장 눈에 띄게 발전한 와인 생산국은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1519년 왕실 간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이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네덜란드와 손을 잡게 됐다. 17세기 초반 네덜란드 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해외 진출을 통해 황금기를 맞이한 곳이다. 참고로 네덜란드 경제 발전의 출발점은 다름 아닌 청어잡이였다. 육류와 가금류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던 중세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매년 천만kg 이상 잡히는 청어는 대단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당시 네덜란드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는데 그 중 약 20만 명이 청어잡이에 종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문제는 생선이어서 상하기 쉽다는 것. 하지만 14세기에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으로 절이는 방식이 개발되면서 해상 운송을 통해 외국에까지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한 어업의 발전이 나중에 해상 무역으로 연결되면서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고, 선박 건조 및 항해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한 1602년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인 동인도 회사로 인해 네덜란드는 아시아 무역을 거의 2세기 동안 독점하면서 세계 최대의 무역국으로 부상한다. 네덜란드에 ‘바다 위의 짐 마차꾼’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의 브랜디를 성공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당시 증류주는 ‘aqua vite’ 생명의 물이라고 불렸다. 즉, 초기에는 술이 아닌 약으로 쓰였기 때문에 약사나 의사 외에는 만드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비네거를 제조하는 업자들이 와인의 증류 허가를 받았고, 1537년에는 증류가 술집 주인들에게까지 풀렸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내수 및 재수출용으로 브랜디를 대거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주류 시장의 판도가 바뀌게 된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선단을 거느렸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선원들에게 지급할 술로 브랜디를 구입했다. 더운 지방을 항해할 때 물이나 와인에 브랜디를 섞으면 상하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고, 반대로 추운 지방을 항해할 때는 브랜디 자체가 몸을 데워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선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술로 자리 잡게 됐다. 실제로 브랜디라는 어원 자체가 ‘태운 와인’이라는 네덜란드어 ‘브란데베인’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상기하면 네덜란드인이 브랜디의 발전에 미친 영향이 대단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브랜디가 돈이 된다는 것을 간파한 네덜란드인들은 최초에는 보르도와 루아르 강변에 증류소를 건설했다. 하지만 보르도의 와인 품질이 높아지고 가격이 상승하면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는데, 바로 그곳이 보르도 북쪽의 샤랑트다. 브랜디라는 것이 와인을 증류해서 만들기 때문에 와인의 품질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 샤랑트는 오래 전 보르도에 밀려 별 볼 일 없는 와인 산지였는 데다가 산림 지대였기 때문에 증류장에서 와인을 증류할 때 쓸 땔감을 공급하기에 천혜의 장소였다. 1624년에 샤랑트에 최초의 증류장이 건설되었고 순식간에 브랜드 수출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640년에 브랜디에 세금이 부과되었고 1660년대 샤랑트는 대규모 증류 사업의 중심지가 됐다. 현재 세계 최고의 브랜디 생산지로 명성이 자자한 코냑과 아르마냑이 바로 이렇게 탄생한 셈이다.
브랜디의 탄생은 칵테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6세기 노르망디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수도사는 브랜디에 꿀과 허브를 섞어 베네딕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유명한 칵테일인 B&B는 베네딕틴에 브랜디를 반반씩 섞어 만든다. 베네딕틴 리큐르 자체가 브랜디를 베이스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야말로 브랜디에서 탄생한 칵테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17세기 파리의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브랜디에 무려 백여 가지의 허브를 섞어 샤르트뢰즈라는 이름을 붙였다. 샤르트뢰즈는 현재도 수도원 수도자들의 감독 하에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리큐르다. 참고로 샤르트뢰즈는 무려 브랜디에 131가지 약초를 넣어 숙성 시켜 탄생되며, 구체적인 재료나 블렌딩 비율은 여전히 비밀이라고 한다. 책임을 맡은 두 수도사가 각기 레시피의 절반씩을 갖고 있는데, 이 둘을 합쳐야 샤르트뢰즈가 된다고 한다.
브랜디의 탄생은 세계 전역의 각종 증류주의 탄생도 일으켰다. 증류 대상이 꼭 와인이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곡물을 발효해 위스키, 보드카, 진 등을 탄생시켰다. 포도가 자라지 않는 다른 지역에서도 이제 배만 부르고 잘 안 취하는 맥주 대신 독주를 마실 수 있게 된 셈이다. 브랜디를 포함한 여러 증류주들은 알코올이 높고 부피가 맥주나 와인보다 적었기 때문에 운송료가 적게 들었다. 때문에 가격도 저렴했다. 이로 인해 북유럽과 러시아 주류의 역사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고, 후에 유럽의 식민지에도 증류주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다.
네덜란드 상인과 관련해서 와인 애호가의 입장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는 이들이 수많은 지역의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에도 뛰어들었고, 이중 보르도 와인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프랑스 와인 산업이 격변을 맞이한 17세기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네덜란드의 시대였다. 이들은 유럽 대부분의 와인 운송업을 장악했고 이를 통해 와인 메이킹 스타일이나 종류까지 관여했다. 특히 이들이 유럽에 소개한 기술 중에 매립 기술이 있다.
‘신은 세상을 창조하고, 네덜란드인은 자신들의 땅을 만들었다’는 네덜란드 속담이 있다. 매립으로 완성된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말이다. 네덜란드는 해수면보다 낮은 땅이 국토의 4분의 1가량인 탓에, 인근 북해로부터 수백 년간 위협을 받아왔다. 북해에서 태풍이 발생하면 매번 가장 큰 피해를 보기 때문에 해안을 지키고 자신들의 땅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게 매립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주요 도시들도 매립으로 탄생했다. 보르도에서 네덜란드 기술자들은 주요 강둑을 따라 매립지를 만들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늪지대는 포도밭으로 둔갑했다. 이렇게 탄생한 충적토는 포도를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현재 메독 지방은 본래 드넓은 습지대였지만, 네덜란드인들의 매립 기술이 더해져 물이 빠져나가자, 포도를 재배하기에 이상적인 자갈 토양이 드러났다. 세계 최고의 레드 와인 생산지가 이렇게 탄생한 셈이다.
포인트는 네덜란드인들의 입맛은 전통적인 보르도 와인의 소비층인 영국인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영국인들이 색이 밝고 가벼운 맛(클라레)을 선호했던 반면, 네덜란드인들은 달콤한 화이트 와인 혹은 색깔이 짙고 풀바디한 레드 와인을 좋아했다. 17세기 보르도의 와인 생산자들은 주요 고객으로 부상한 그들의 입맛을 위해 맞춤 포도나무를 심었다. 스위트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레드에서 화이트 품종으로 바꾸고, 포도나무도 머스캣을 바꾼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화에서 탄생한 와인 생산지가 바로 소테른이다. 반대로 풀 바디한 레드 와인은 그라브나 메독의 충적토에서 담당하게 된다.
또한 네덜란드인들은 와인의 보존 기간을 연장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와인의 보존 기간을 늘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에탄올을 첨가하는 것이었지만, 이 경우 와인이 지닌 본래의 캐릭터가 손상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네덜란드인들은 라인 지방의 비법을 보르도에 소개했다. 바로 빈 나무통에 황을 넣고 내부를 그슬린 뒤 와인을 그 안에 보관하면 와인이 오래간다는 것을 오래전 깨달은 것이다. 과학적으로도 황은 와인의 산화 및 유해균의 증식을 막으며 또한 효모의 활동을 억제해 후발효를 억제하는 기능이 있다. 지금도 와인병에 소량 이산화황을 첨가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만 황 냄새가 와인에 배였기 때문에 이를 위해 나무통에 오랜 시간을 묵혀야 했는데, 후에 가서는 이런 오크통 숙성이 고급 와인의 발전에 일조하기도 했다.
이런 네덜란드의 독주가 프랑스 정부의 입장에서는 불편했던지 외국 선박의 출입을 제한하기도 했다. 1660년대 루이 14세의 재상이었던 콜베르가 외국 상선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자 와인 수출에 브레이크가 걸린 보르도에서 왕실과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네덜란드는 다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고, 바로 스페인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렇게 발굴된 새로운 스페인 와인 산지가 지금의 헤레스와 말라가, 그리고 알리칸테다. 물론 프랑스와의 빈번한 마찰로 다른 와인 산지를 물색 중인 영국의 눈에 띈 것도 스페인이다. 색(sack 혹은 seck)이라 불렸던 스페인 와인이 가장 유명했는데, 이 와인이 바로 셰리의 전신이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와인의 소비와 수출 증가로 한몫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포도밭으로 바뀐 땅이 얼마나 많았던지, 1579년 스페인 의회가 더 이상 포도밭이 생기는 것을 규제해 달라고 황제에게 탄원서를 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다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