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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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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관상

정휘웅 2019년 7월 30일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기(氣)”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문밖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거나,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편이 나에게 어떤 생각(호감/적대)을 품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리고 특정 직종군의 사람들을 오래 만나다 보면 그 직종군의 사람마다 엇비슷한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혹자는 내가 로버트 파커와 얼굴 느낌이 비슷하다는데, 아마도 체적이나 크기는 비슷하겠으나, 나머지는 전혀 아니니 추측은 말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와인의 느낌과 와이너리의 주인 관상, 그리고 라벨의 느낌이 꽤 비슷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관상은 변한다. 그 사람의 살아온 걸음걸이가 그 얼굴에 드러난다. 돈의 유무, 지위의 고하를 떠나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선한 마음을 근본에 두고 사람을 대하는지, 의심의 마음을 두고 대하는지, 다른 목적을 두고 사람을 대하는지에 대한 느낌을 받게 되며, 그 특성은 얼굴에 고스란히 “격”이라는 것으로 드러난다. 흘러온 시간의 모든 합이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셈이다. 와인의 관상도 변한다. 오래된 빈티지라 하더라도 포도원에서 레이블을 오래 보관한 다음 출고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 경우에도 설명되지 않는 나이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는 레이블이 인쇄된 연도에서 밀봉보관이 된 이후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병이 주는 느낌도 아무리 깨끗하게 닦아도 은연중에 드러난다.

빈 병의 레이블은 빠르게 늙고 빛을 잃어버린다. 레스토랑의 셀러를 잘 살펴보면, 간혹 빈 병을 진열해두는 경우가 있는데, 그 병들의 레이블은 빠르게 퇴색한다.(물론 아니라고 할 이도 있으나, 나는 적어도 그렇게 느껴왔다.) 이는 와인 자체에도 사람처럼 기가 흐른다는 것이고, 그것이 레이블과 교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와인의 레이블은 그런 관점에서 와인의 본질(병 속에 들어있는 포도주)과 우리의 자아 사이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자신의 모습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라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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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체적인 느낌이 포도주와의 설명되지 않는 교감을 말해준다면, 레이블의 모양, 그 위에 쓰여 있는 정보, 디테일은 포도원의 오너나 와인메이커의 특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어떤 와인은 설명이 매우 세밀하다. 특히 독일 포도원들을 살펴보면, 법적인 규정도 매우 까다롭지만, 그 이외의 사항들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허가번호 정보까지 기재하게 되어 있으며, 각 정보는 포도가 익은 단계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도 규정이 있지만, 레이블에 반드시 표기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프랑스의 포도원들은 간혹 백라벨이 없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불친절하다. 블렌딩이나 여러 가지 사항들도 부정확하다. 와인메이커를 만나서 물어봐도 비율을 정확하게 답하는 포도원과 아닌 포도원이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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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율이 명확하지 않거나 비율이 해마다 바뀌는 포도원은 다시 기록을 꼼꼼하게 남기는 포도원과 아닌 포도원으로 나뉜다. 꼼꼼한 포도원일수록 홈페이지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해마다 블렌딩 비율을 철저하게 정리하여 남겨둔다. 아닌 포도원은 주인에게 물어보아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변은 “맛있으면 그만 아닌가?”하는, 다소 질문자를 황당하게 만드는 답변도 간혹 듣게 된다. 어쩌면 진짜 맛있게 만드는 비법을 숨기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대체로 자연에 집중하는 포도원들은 자연에 대해 많이 다가가는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에 스타일도 약간의 오차를 허용한다. 그리고 이는 와인 레이블에도 많이 반영되는데, 소탈한 성격이나 느낌을 주는 포도원의 레이블은 로고나 그림이 좀 더 투박하고 거칠다. 그리고 글씨와 그림, 문양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다. 정보가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괴짜 같지만, 와인은 맛을 보면 희한하게 맛있다.

깔끔한 포도원의 경우 주인의 옷차림도 매우 깔끔하고 정중하다. 얼굴에는 언제나 선함과 상대에 대한 배려심도 있다. 그러나 느낌에 완벽주의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2016년 프로바인(Prowein)에서 만났던 이탈리아 바롤로 명가이자 마솔리노(Massolino)의 오너인 프랑코 마솔리노(Franco Massolino)씨의 느낌이 그러했다. 와인의 레이블은 백지장 같은 흰 바탕에 세련된 글씨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나머지는 약간의 양각 인쇄지를 사용했다. 와인도 이러한 최소화된 느낌에 좀 더 깊은 테루아의 질감과 포도 자체의 캐릭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큰 회사의 경우 와인 메이커의 특성이 와인 레이블에 그대로 투영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와인 자체를 마셔보면 그 와인 메이커의 스타일을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는 경우도 많다. 다시 프로바인으로 돌아와서 당시 만났던 비달 플뢰리(Vidal Fleury)의 와인 메이커 기 사흐통 뒤 종쉐(Guy Sarton du Jonchay)의 느낌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자세, 언급, 그리고 인상에 이르기 까지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코트 로티를 테이스팅 한 결과 그 부드러움과 안정감, 자연스러움, 평안함을 명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와인 메이커의 얼굴이 주는 그 느낌과 와인이 주는 느낌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다. 매일 포도밭에서 사는 포도원의 와인에는 흙내음이 많이 나고, 칼 같은 정교함을 원하는 포도원은 좀 더 깊은 과실의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라벨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오너라면 그 느낌이 더욱 고스란히 와인 라벨로 옮겨온다. 여기에 와인 마케팅에 눈이 밝은 미국의 와인 메이커들은 좀 더 친절하다. 아주 자세히 와인의 정보를 기술할 뿐만 아니라 마케팅의 요소까지 가미하여 기술한다. 어지간하면 블렌딩의 비율이 바뀌면 이를 깨알같이 뒷면에 기재한다. 또한 어디에서 몇 점의 점수를 받았는지 병 주변에 덕지덕지 붙이기도 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고가 좀 더 지배적인 경향을 반영하여 레이블도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더 강조한다. 미국의 와인 역시 테이스팅을 하면 그 포도원의 성격이나 스타일을 알 수 있다. 몇 해 전에 오너인 크리스 카마르다(Chris Camarda)를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약간은 도인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옷도 깔끔하게 입었고, 표정도 단정하였으나, 그 이면의 도인같은 느낌, 그리고 깊은 내공이 느껴졌다.

와인의 느낌은 그대로였다. 2016년 12월 말에도 그의 대표 와인인 소렐라(Sorella) 2008을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놀라운 균형감과 함께 설명되지 않는 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정갈함과 깔끔한 내면은 와인 메이커의 단정한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어떤 와인은 해를 거듭하면 변화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소렐라는 매우 안정된 느낌에서 최소한의 변화를 조금씩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내가 와인메이커와 가까운 친구도 아닐뿐더러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으나, 와인 메이커의 캐릭터가 어떠한지는 이 와인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어느 수준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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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과학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나, 와인의 기운을 느껴보고, 포도원의 주인이나 와인메이커가 어떤 사람일지를 상상하는 것 역시 즐거운 요소가 될 수 있다. 오늘 와인을 한 잔 마신다면 그 포도원의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그 포도원의 양조자나 오너가 어떤 사람인지 얼굴을 한번 보자. 레이블도 한번 보자. 그리고 앞서 이야기 한, 병이 주었던 느낌, 빈티지 레이블의 느낌, 와인 정보의 깨알 같은 기술정보, 그리고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와인의 느낌이 맞는지 틀린 지 느껴보면 어떨까 싶다.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이 더욱 커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2016년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해준 앤드류 윌 소렐라의 시음노트로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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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짙은 루비색을 띠고 있다. 이 와인의 아로마는 쉽사리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안개처럼 바닥에 잘 깔려 있기 때문인데, 묵직하면서도 깊은 안개처럼 서서히 올라오며 태양이 떠오르면 이내 사라진 듯하지만, 주변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대지의 느낌과 같다. 워싱턴 지역의 좀 더 잘 익고 차가운 느낌이 드는 카시스 계열의 캐릭터가 많이 들어 있으며, 은은한 감초와 라스베리, 산딸기 같은 느낌이 은은하게 전해진다. 복합미 사이로 잘 녹아 있는 산도와 달콤한 느낌의 조화는 와인을 시음한 뒤, 30분 뒤에 한 모금을 더 마시면 느끼게 된다. 디캔터에 천천히 아로마를 끌어올리듯 시음해야 하며, 흔들어서 깨우려 해도 쉽게 깨어나지는 않는다. 그만큼 안정감이 있는 와인이다. 지금 마시기에도 좋지만 10년 뒤에도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판단된다. 포도의 질감이 좋기 때문에 더디게 숙성이 될 와인이다. 보르도보다 영 빈티지일 때에도 무리 없이 입 안에 정착할 수 있는 와인이다. 소량 생산 와인이지만, 그 가격의 가치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와인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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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휘웅

- 김준철 와인아카데미 마스터, 양조학 코스 수료 - 네이버 와인카페 운영(닉네임: 웅가) - 저서: 와인장보기(펜하우스), 와인러버스365(바롬웍스) - (현)공개SW협회 공개SW역량프라자 수석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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