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두 번째 와인바 Talk, 와인 스타일에 영향을 끼치는 필터링(Filtration)
한때 무슨 붐이 불었는지 와인바에 오는 많은 손님이 내추럴 와인(natural wine)을 찾던 시기가 있었다. 아마 와인 업계에서 내추럴 와인을 많이 수입해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시도했던 때였을 것이다. 사실 내추럴 와인의 역사는 아주 길고 길어, 굳이 내추럴 와인이라고 내세우지 않고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진짜 내추럴 와인’이 국내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
사람의 공이 많이 들어간 제품엔 그에 합당한 가격이 책정되는 것처럼, 내추럴 와인은 만들기가 어려워 그 가격대가 일반 와인보다 비싸 사실상 대중에게 큰 인기를 누리던 와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추럴 와인이라고 이름 지어졌으면서도 상당히 저렴한 가격대에 심지어 와인병도 트렌디(trendy)한 와인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내추럴 와인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인기가 높아졌다.
호기롭게 내추럴 와인을 시켜서 맛을 보았는데, 사실 맛이 좀 특이하다고 느낀 때가 많았을 것이다. 와인바 손님들이 내추럴 와인을 마시며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맛이 독특하고 와인이 탁하다는 이야기였다. 와인이 탁하다는 표현을 보통 해외에서는 구름이 낀 것 같다는 ‘클라우디(cloudy)’라는 단어를 쓰거나 앞이 안 보인다는 뜻으로 ‘블라인드(blind)’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런 표현은 와인의 정화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 와인을 구분할 때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사람의 손을 좀 덜 거친 ‘자연스러운’ 제조 과정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와인은 정화 과정을 거친(filtered wine) 와인과 정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unfiltered wine) 와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발효가 끝난 와인은 이스트, 박테리아나 포도 찌꺼기 등 각종 침전물 덩어리들로 가득차 있다. 이 침전물은 와인이 병입 되기 전에 깨끗하게 걸러져 뿌옇던 와인이 맑은 와인이 된다. 와인은 보통 이스트 찌꺼기를 제거하는 첫 번째 여과 과정과 박테리아를 제거하는 두 번째 여과 과정을 거치는데, 여과 시트지(sheet filter)와 멤브레인 필터(membrane filter) 등을 이용하여 찌꺼기나 박테리아 등을 제거한다.
정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와인은 이런 필터 과정을 거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와인을 발효가 끝난 상태 그대로 두지는 않는다. 이스트를 인위적으로 필터링하는 대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침전물이 가라앉도록 하고, 그 후에 래킹(racking)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래킹이란, 발효 탱크나 오크통에서 와인이 발효 과정을 거친 후, 가라앉은 침전물은 그대로 두고 침전물 윗부분의 와인을 다른 탱크나 오크통으로 옮겨 자연스럽게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예외적으로 일부 지역, 혹은 와인 메이커나 와인 스타일에 따라 래킹 조차도 하지 않고 와인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필터링이라는 정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와인은 래킹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맑아지지만, 필터링을 거친 와인보다는 여러 부유물이 남아있어 이것이 와인에 독특한 풍미와 질감을 준다. 실제로 일부 고급 와인들은 의도적으로 필터링을 하지 않고 와인 속에 침전물을 그대로 두어, 와인병 속에서의 숙성을 유도하여 와인의 잠재력을 끌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필터링을 하지 않은’ 와인의 경우 와인의 변질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필터링으로 거르지 않은 와인 속에 남아있는 박테리아 등이 와인의 변질 가능성을 향상시켜 결국 와인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와인의 변질을 막는 이산화황(SO2)을 많이 첨가하기도 한다. 이산화황 같은 화학물질을 첨가한 와인이 과연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내추럴 와인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지만, 우선 이산화황은 인체에 무해하고 상한 와인이 와인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내추럴 와인과 더불어 유행했던 와인 중 하나가 바로 오렌지 와인(orange wine)이다. 오렌지 와인은 일반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만들지만 화이트 와인을 만들 때 잘 넣지 않는 포도 껍질이나 가지 등을 함께 넣고 오랜 시간 발효 숙성시켜 독특한 풍미와 색을 지닌 와인이다. 이 와인 역시 내추럴 와인의 방식으로 만들며 필터링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내추럴 스타일의 오렌지 와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경우 색은 약간 뿌연 오렌지색이며 과실 향과 산화 과정에서 비롯된 견과류의 향이 나기도 하며, 맛은 독특한 신맛과 화이트 와인에서 느끼기 힘든 타닌(tannin)감도 느낄 수 있다. 화이트 와인이지만 레드 와인의 느낌도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와인이 맑지 못하면 상한 와인 혹은 잘못 만들어진 와인으로 취급받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와인의 투명도란 와인의 품질을 결정하는 척도가 아니라 와인의 스타일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필터링한 와인과 하지 않은 와인을 구별 없이 맛보고 편견 없이 받아들이며 자신이 선호하는 와인 스타일을 찾아가는 것이 와인을 즐기는 기쁨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