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바인(Old Vines)이라는 용어는 와인 라벨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항상 볼 때마다 이 용어가 무슨 의미를 갖길래 와인 라벨에 앞다투어 자랑하는지 궁금했었다. 위의 그림과 같이 프랑스 와인에는 비에이유 비뉴(Vieilles Vignes), 스페인이나 남미 와인에는 비냐스 비에하스(Viñas Viejas), 포르투갈 와인에는 비냐스 벨라스(Vihnas Velhas), 이탈리아 와인에는 베끼오 비녜(Vecchio Vigne), 독일 와인에는 알테 레벤(Alte Reben)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올드바인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법적인 정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흔히 수령이 꽤 있는 포도나무에서, 조금 더 잘 보존된 포도에서 나온 더 나은 품질의 와인은 아닐까 기대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최소 50년 이상 수령의 포도나무를 올드바인의 기준이나 혹은 척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재배가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신대륙 같은 곳에서는 30년 이상을 올드바인의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올드바인은 포도 재배에 어려움이 많고 수확량도 적지만, 농축 미가 뛰어나고 밸런스가 좋은 와인을 생산해 낸다고 알려져 있다. 어린 포도나무들의 경우, 수확량이나 품질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올드바인은 꾸준히 어느 정도 이상의 품질의 포도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올드바인은 더 빨리 포도를 익힐 수 있는 세월의 지혜도 겸비했다.
이러한 올드바인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오랜 시간에 걸쳐 땅속 깊숙이 박힌 뿌리이다. 지상의 기후에 따라 변화가 적은 심토에 박힌 뿌리는 땅 위에서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이 오더라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에 올드바인 와인의 경우, 빈티지별 영향이 어린 포도나무에서 만들어진 와인보다는 적다고 생각한다.
와인 스펙테이터의 Matt Kramer는 올드바인 와인의 진정한 차이는 10년 이상된 올드 와인에서 그 진면목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올드바인 와인에서의 한층 성숙된 차곡차곡 쌓여진 복합 미가 돋보이며 이 차이는 Mid palate(중간맛)에서 더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마치 사탕을 녹여 먹다가 사탕이 점점 더 작이질수록, 점점 더 사탕의 중심으로 갈수록 맛있는 사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잰시스 로빈슨의 ‘Oxford Companion to Wine’에 따르면, 프랑스 샴페인 생산자인 볼렝저(Bollinger)가 처음으로 올드바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포도밭은 슬로베니아 마리보르에 위치한 자메토브카(Žametovka)이며 17세기부터 아직까지 와인 생산을 위한 포도를 35~55kg 정도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동북 이탈리아 남 티롤 지역의 350년 이상의 베르소알른(Versoaln) 품종을 가지고 있는 와이너리인 Castel Katzenzugen이나, 1769년 영국의 햄튼 궁에 심겨진 시바 그로사(Shiva Grossa) 나무 등이 올드바인의 증거로서 존재한다.
또한, 상업적 목적으로 심은 최초의 올드바인은 호주 바로사 밸리에 1843년 심어졌다고 알려진다. 2009년, 바로사 밸리는 적극적으로 올드바인 포도나무를 보호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바로사 올드바인 차터(Barossa Old Vine Charter)를 설립한다. 이 차터 수립에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경영 와인 회사인 얄룸바(Yalumba)가 적극적으로 기여했으며, 총 173개의 와인 생산자와 750개의 와인 생산용 포도 재배자들이 소속되어 있다.
이 차터는 크게 네 가지 카테고리로 올드바인을 구분하는데, 이는 35년 이상의 나무는 바로사 올드와인(Barossa Old Vine), 수령 70년 이상의 나무는 바로사 서바이버 바인(Barossa Survivor Vine), 수령 100년 이상의 포도나무는 바로사 100세 바인(Barossa Centenarian Vine), 125년 이상의 나무는 바로사 조상 바인(Barossa Ancestor Vine)이다.
호주의 바로사 지역이 이렇게 다양한 올드바인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연히 필록세라(Phylloxera)가 등장한다. 바로사 밸리 지역은 우선 발을 붙였다 하면 모든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 품종을 몰살시키는 이 무시무시 필록세라로부터 한 번도 공격받지 않은 청정 지역이며, 이로 인해 올드바인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지난달에 열린 호주 와인 그랜드 테이스팅에서 필자는 데니스 개스틴 작가가 개최한 ‘호주: 쉬라즈의 대륙’이라는 세션에 참가하였다. 그곳에서 필자는 호주 쉬라즈 와인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9개의 와인을 테이스팅 하였다. 세 가지의 테마로 세 가지 와인을 테이스팅하는데 그중 첫 번째 테마가 올드바인 이었다. 그동안 올드바인 와인을 여러 번 접하였으나 세 가지의 같은 품종의 같은 국가의 올드바인 와인을 접할 기회는 흔치 않아 매우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로 테이스팅한 Tyrrell’s Stevens Vineyard Shiraz 2014 Hunter Valley 와인은 100% 올드바인 포도로 만든 와인은 아니고 10~20%의 함유로 만들었다고 소개되었다. 올드바인을 소유하게 된 경유를 보면 Terrell 가족은 1858년 처음 포도나무를 심었으며 이후 1863년 와이너리를 설립하고 1864년 최초 빈티지를 생산하여 그 명맥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유서 깊은 와인 집안이다. 필자가 테이스팅한 와인에는 1867년 식재한 포도나무를 이용하여 생산하고 있으며 이는 헌터밸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아직 어린 빈티지인 만큼 딥 퍼플 컬러에 핑크색 테두리 색을 보였으며, 과실 향이 매우 풍부하고 오크 풍미도 좋았지만 절대 과하지는 않은 중용의 미를 보여준 와인이었다.
두 번째로 테이스팅한 와인은 Schild Estate Moorooroo Limited Shiraz 2012 Barossa Valley입니다. 이 와인은 1847년 식재한 포도나무로 만드는 100% 올드바인 와인이다. 빛도 투영되지 않을 것 같은 진한 퍼플컬러에 유칼립투스, 블랙 체리, 바닐라, 제비꽃 향, 머스크 향까지 복합 미가 뛰어나고 향도 매우 좋은 추천하고 싶은 와인이었다. 세월을 마시는 기분이랄까?
세 번째로 테이스팅한 Tahbik 1860 Vines Shiraz Nagambie Lakes 와인은 미국 와인앤스피리츠(Wine&Spirits)에서 선정한 세계 25대 와인 중 하나이다. 1860년에 설립된 Tahbik은 골번(Goulburn) 강을 따라 포도 나무를 식재 했는데 그 최초 포도밭 중 0.5ha 정도의 쉬라즈 포도밭이 현재에도 남아 이 와인으로 생산되고 있다. 노즈에서는 매우 달달한 잘 익은 과실 향과 스윗 스파이스 향이 돋보이지만, 입에서는 (조금 과장하자면) 짙게 농축된 피노누와 같은 여리여리한 여성미가 나는 반전이 있는 와인이었다. 아마 높은 산미와 부드러운 타닌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이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했다면 쉬라즈라고 말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스팅한 세 와인의 공통점을 꼽자면, 부드러운 타닌 감과 뛰어난 복합 미 그리고 잠재된 숙성력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올드바인, 같은 나라, 같은 품종일지라도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와인은 정말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다. 와인의 세계 앞에 조금 더 겸손해지는 하루이다.
<참고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