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했던가. 그러나 해가 바뀌고 그 숫자에 1이 더해지면 어쩐지 위기감이 엄습하고, 연말까지 흥청거리던 사람도 연초에는 또렷한 정신으로 생산적인 일상을 보내려고 애쓰게 마련이다. 영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1월 한 달 동안 아예 금주하는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를 실천하는 이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반면 우리 옛 조상들은 설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술을 나눠 마셨으니, 다름 아닌 세주(歲酒) 전통이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정초부터 곤드레만드레 취하자고 벌이는 일은 물론 아니었으니까.
세주의 대표, 도소주와 초백주
세주는 설 차례상에 올리거나 설날에 가족과 함께 마시기 위해 담그는 술을 이르며, 한 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다양한 약재를 넣고 끓여낸다. 대표적인 세주로서 여러 문헌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 도소주와 초백주다.
죽일 도(屠) 자에 사악한 기운을 뜻하는 소(蘇) 자를 쓰는 ‘도소주’는 말 그대로 사악한 기운을 쫓아 건강하고 길한 한 해를 기원하는 술로, 중국 양나라 대의 문헌 『형초세시기』에 관련 기록이 전해진다. 한반도에는 통일신라 시대 즈음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사촬요』, 『동의보감』, 『임원경제지』, 『열양세시기』 등 우리 문헌에서도 도소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천초와 백엽을 넣어 만드는 ‘초주’ 혹은 ‘초백주’ 역시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임원십육지』와 홍석모의 세시풍속서 『동국세시기』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가족과 이웃의 건강을 비는 풍습
『고사촬요』에 따르면 도소주는 오두거피, 대황, 거목, 완계, 천초, 계심 등을 그 재료로 하며, 『동의보감』에서는 백미, 대황, 천초, 거목, 길경, 호장근, 오두거피를 주머니에 넣어서 섣달그믐에 우물에 넣었다가 새해 첫날 꺼내어 술에 넣고 잠깐 끓여서 동쪽으로 향하여 마시면 1년 내내 질병이 없다고 적고 있다. 조선 사대부의 시문집에도 자주 등장하는 초백주는 천초와 잣나무 잎(백엽)을 넣고 끓여 만들며, 『임원십육지』에 그 빚는 법이 적혀 전해져 내려온다.
약재를 굳이 하룻밤 우물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술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한국의 전통명주 1: 다시 쓰는 주방문』은 “우물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사용하는 것으로, 약재를 우물에 담가 두어 온 마을 사람들이 약성이 우러난 우물물을 다 같이 나눠 마심으로써, 온 마을에 질병이 없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럼 도소주와 초백주에 쓰이는 약재는 정말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을까? 도소주의 재료로 언급되는 대황은 위를 튼튼히 하고 변비나 소화불량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심은 계피의 껍질을 벗겨낸 속 부분으로 이질이나 설사를 치료하는 약재로 쓴다. 도라지 뿌리를 말린 길경은 감기로 인한 기침과 가래, 기관지염에 좋다고 한다. 초백주의 주재료인 천초는 흔히 추어탕을 먹을 때 넣는 산초의 다른 이름으로, 특유의 화한 맛을 내는 산솔 화합물 성분이 구충 및 항균 작용을 한다. 또한 백엽 혹은 측백엽이라 불리는 잣나무 잎은 거담을 제거하고 출혈을 멎게 하는 약재다. 중병은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걸리기 쉬운 자잘한 질병들을 예방하는 의미에서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도소주와 초백주에 넣을 약재들을 선택했던 것이다.
주술적인 의미도 있었다. 도소주와 초백주에는 술에 붉은색을 더하는 천초를 쓴다. 문헌에 따라서는 도소주에 붉은 팥을 넣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병마와 귀신을 쫓기 위해 동지에 붉은 팥죽을 쑤어 먹듯,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려 붉은 약재의 힘을 빌린 것이다.
어린아이부터 마시는 술
밥상에서는 어른이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는 나라에서 아이가 먼저 나서서 뭘 먹었다가는 꾸지람을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엄격한 유교적 전통에도 어린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는 때가 일 년에 한 번 있으니, 바로 설날 세주를 나눠 마실 때다. 『사민월령』에는 “술잔을 올리는 차례가 어린이부터 시작된다”라고 적혀 있으며, 『동의보감』도 “특이한 것은 어린 사람부터 먼저 마시기 시작하여 차례로 나이가 많은 사람 순서로 마신다”라고 전하고 있다. 어린이는 어른에 비해 면역력이 약하고 전염병에 취약하니 아이에게 먼저 술잔을 건넸다는 것이 현대의 해석이다.
마시는 순서야 그렇다 치고 어린아이에게 술을 먹여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까? 상기했듯 도소주나 초백주는 약재를 술에 넣고 잠깐 끓여내기 때문에 알코올 성분은 거의 날아가고, 오히려 부드럽고 순한 맛만이 남아 아이가 마시기에도 무리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이에게 술잔을 건네며 음주 문화와 예절을 가르치는 의미도 있었다니 ‘술은 어른에게 배우는 것’이라는 말의 시초가 어쩌면 세주 문화였을지도 모르겠다.
먹고살기 힘든 서민층에서는 이런저런 귀한 약재들을 구할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무병 무탈한 한 해를 바라는 마음은 돈이 있고 없고, 신분이 높고 낮고를 가리지 않았을 것. 형편이 되지 않는 이들은 일반 청주를 나눠 마시며 도소주의 의미만을 새기기도 했다.
2021년이 밝은지도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굳건한 의지로 다짐했던 새해 목표들이 벌써 흐지부지되어 우울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한국인에게는 망한 1월을 뒤로하고 두 번째 새해 다짐을 할 기회인 설날이 있으니 절망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올 설에는 삼계탕용 약재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청주와 함께 끓여 마시며 한 해 동안 건강하고 힘차게 살아낼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