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새로운 프랑스 The New France』를 썼을 때 매 장마다 똑같은 표현을 반복해 사용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바로 “비개입주의, non-interventionism”라는 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프랑스어에는 그와 같은 표현도 없다. 그것을 프랑스어로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도 몰랐다.
책은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고, 이 경우 독자는 영어를 쓰는 와인 애호가와 와인메이커들이다. 당시 프랑스는 법적으로 융통성이 없고 질적으로 일관성이 없어 눈 밖에 나 있었다. 반대로 남반구 지역과 캘리포니아가 상승세를 보이며 그들의 “믿을 수 있는” 개입주의자들이 만든 와인들이 널리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남반구와 북반구를 통틀어 모두가 테루아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말을 해댔다. 그것이 바로 고급 와인의 미래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내 눈에는 이상한 점이 보였다. 그래서 “비개입주의”라는 말을 통해 프랑스에서 너무나도 널리 쓰여서 누구도 언급조차 잘 하지 않는 테루아의 근본적인 진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 진실은 바로 이렇다. 어떤 장소를 표현하는 와인을 만들고 싶다면 그 장소를 존중하고 원재료 면에서 그것이 당신에게 가져다주는 것들을 존중해야 한다. 장소, 품종, 계절은 포도즙의 화학적 구성 성분에 모두 반영되어 있다. 원한다면 개입해 그것들에 수정을 꾀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장소와 계절의 느낌을 지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사실이 널리 이해되고 있다. 이 책을 다시 쓴다면 이 어색한 표현을 언급조차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단계를 모두 넘어섰다. 버스가 다니는 곳을 지나쳐서 ‘내추럴’ 와인이라는 깊은 숲과 험준한 고지대까지 왔다. 때로는 태양이 그 고지대를 비추며 놀라운 효과를 내기도 한다. 때로는 숲이 비에 흠뻑 젖어 큰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내추럴 와인의 전제는 절대적인 비개입주의,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이상한 점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라이언 크로서는 최근 그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비개입주의란 와인 양조를 포기한다는 뜻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이 빛을 발하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와인메이커를 산파로 비유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산파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자연이 마음대로 하게 둔다면 분만 시 목숨을 잃는 아기들의 수는 비극적인 수준까지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다른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근본주의적인 비개입주의는 재앙이다.
“역설적이지만 포도를 재배하고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 성공적으로 진정 ‘비개입’ 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정보에 입각한 관찰의 힘, 그리고 큰 자본 투자가 필요합니다.” 크로서의 말이다. 그의 말이 맞다. 물론 소규모 생산자들은 큰 자본 투자를 상당한 노력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공적인 비개입주의의 정의를 내려보는 건 어떨까? 크로서가 말한 것처럼 두 가지 핵심은 바로 ‘지식’과 ‘관찰’이다. 생산자는 포도밭에서, 발효 탱크에서, 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식이 필요하고, 이는 곧 지속적으로 철저히 그것을 관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생산자는 싹눈이 나오는 순간부터 와인을 병에 넣을 때까지 보초 임무를 서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자신이 관찰하는 바에 대해 언제나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비개입주의 양조는 곧 적극적인 무활동을 뜻한다. 원재료를 최대한 존중하고 여기에 일탈은 최소한으로 한다.
장소와 계절이 허락하는 최고의 포도를 완벽한 성숙의 순간에 수확하기 위해서는 여름 내내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얻은 포도즙을 맑고 투명하게 발효시키기 위해서는 집중적인 분석, 인내심, 흠잡을 데 없는 위생, 제한된 오크 사용, 양조 상의 개입보다도 테루아를 지워버리는 만성적인 부패나 균질화 문제를 피하기 위한 현명한 이산화황 사용 등이 필요하다.
이제 남반구와 북반구의 거의 모든 고급 와인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건 우리 와인 애호가들에게 큰 행운이다. 반면 최신 트렌드나 컬트 와인 같은 것들은 종종 자랑스레 이와 대립을 일삼는다. 그런 와인이 순수성과 깊이를 제공하는지, 아니면 당신의 신뢰를 남용하는지 결정하는 건 당신의 몫이다. 와인메이커와 마찬가지로 소비자 역시 보초를 서면서 근본주의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그건 바로 높은 이상에 대한 왜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