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들이 대부분이었던 한 모임에서 와인의 품종이나 지역을 맞추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와인의 맛이나 향으로는 생산 지역을 맞추기에 모호한 와인이 나왔는데, 와인 전문가가 모인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자스 출신의 와인을 쉽게 맞추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유는 주최자의 한 가지 큰 실수 때문이었는데, 높고 긴 알자스 와인 병을 알루미늄 포일로만 가려, 그 모양만으로도 쉽게 유추해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 암포라, 가죽 소재, 주전자, 초대형 항아리에 담았던 와인을 현대인들은 750ml 용량에 대부분 색이 입혀진 유리 와인 병에 담아 마십니다. 로마인들이 입으로 불어 만드는 유리 용기를 만들었지만 생산과 관리가 어려웠기에, 18세기에 들어서야 유리 와인 병에 담긴 와인이 유통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처음의 양파를 닮은 둥근 형태에서 코르크 마개가 사용되며 옆으로 뉘어 보관이 가능한 현재의 긴 형태로 발전하였고, 이후 자외선에 와인이 변질된다는 것을 깨달은 샴페인 생산자들은 착색된 유리병 사용에 앞장섰습니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와인 병의 형태는 10종이 훌쩍 넘습니다. 왜 알자스나 독일의 모젤 지역에서 길고 폭이 좁은 형태를 쓰게 되었는지, 보르도에서 녹색 병을 쓰게 되었는지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800년대 각 지역 생산자들의 필요와 요청에 의해 독자적으로 특정 병이 생산되었고, 이후 1970년대 유럽연합에서 750ml 사이즈를 공식화한 후 지역별로 다양하게 생산된 형태가 고정되어 현재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는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유럽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는 지역의 규제에 맞는 품종을 쓰는 것처럼 일정한 형태의 와인 병에 와인을 담습니다. 사실 지역적으로 와인 병의 형태를 규제하는 것은 딱 두 가지, 바로 프랑스의 알자스와 쥐라 지역의 Clavelin du Jura를 위한 620ml 병 두 종밖에 되지 않음에도, 와인에 강한 자부심을 갖거나 이름만으로도 와인이 잘 팔릴 수 있을 보르도, 부르고뉴, 샴페인은 누구에게나 그들의 아이덴티티와 전통을 알리고자 그 형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와인 병 타입
1. 보르도 : 전통적인 용량은 500ml였으나 유럽연합의 와인 용량 공식화 후 현재의 보르도 병이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병을 피라미드 형태로 쌓을 수도 있어 오랜 기간 숙성에 적합하며, 높은 어깨가 침전물이 쉽게 빠져나오지 않는 데 도움을 주는 것까지 고려되었다는 내용을 Philip Ward의 <The Home Winemaker’s Companion>이라는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부르고뉴 : 부드러운 경사와 서양배 모양을 닮은 부르고뉴 와인 병은 세계적으로 부르고뉴 와인 포도품종인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에 널리 쓰이지만 때론 시라, 그르나슈, 슈냉 블랑 등에 쓰이기도 합니다.
3. 샴페인 : 부르고뉴 병을 닮았지만 탄산의 압력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더 무겁고 넓은 밑부분을 가진 것이 특징입니다. 와인의 병 모양이 와인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영국 시장의 특징에 맞춰 17세기 특별한 샴페인 병이 발명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4. 알자스와 라인 : 샴페인 플루트와 같이 좁고 긴 형태의 병은 프랑스의 알자스, 모젤, 라인 지역에서 주로 쓰입니다. 두 가지의 높이에 350mm와 330mm 두 가지의 병의 넓이가 생산되는데 색상도 파란색에서 투명한 색상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5. 복스보이텔 : 납작한 플라스크 모양의 독일 출신 병입니다. 오늘날 실바너 품종의 와인을 담은 와인은 물론, 포르투갈의 일부 와이너리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6. 키안티 : 와인 병의 일부가 짚으로 덮인 피아스코 병은 본래 연약한 유리 병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키안티에서는 보르도 타입의 병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 와인 병에 담긴 와인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7. 포트 : 세워서 보관하도록 고안된 포트 병은 배럴에서 와인을 쉽게 채울 수 있도록 발명되었는데, 현대에 와서는 코르크로 입구를 막고 옆으로 뉘어 보관도 가능하도록 제작된 긴 유리병 모양의 포트 와인이 널리 유통됩니다.
변화하는 와인 병
샴페인 지역에서는 안정성은 유지하되 예전 병보다 가볍고 유리를 덜 쓰는 방식의 병 생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일반 와인 병의 제작을 위한 기술도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는데, 병 제작과 운송 도중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 환경오염에 대처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중급 이상의 퀄리티를 가진 병은 유럽과 미국에서 주로 생산되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도 와인 병을 생산합니다. 개성 있는 병을 사용하고 싶은 와이너리는 늘어나고 있으나, 슈퍼마켓이나 와인 샵에서 한정된 진열장에 최대한의 와인을 진열하고자 하는 유통업계의 압박으로 대부분의 생산자는 전통적인 와인 병의 형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제작 업체는 와인의 가치를 높여줄 새로운 병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가 인수해 화제가 되었던 프로방스의 로제 와인 미라발(Miraval)은 전통적인 프로방스 로제 병의 형태를 거부하고 특정 샴페인 병을 연상시키는 모양의 병을 생산해 이 와인을 널리 알리는 데 일조했습니다. 스페인의 Hacienda del Carche는 일반 와인 병보다 어깨가 각진 형태의 와인 병을 쓰기도 했고, 보르도의 생산자인 Château Pey-Bonhomme-Les-Tours는 Le Blanc Bonhomme라는 퀴베를 부르고뉴 병에 담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와이너리가 늘어난다면, 앞으로 10년이 지난 후에는 와인 병의 형태로 판단하기보다는 레이블에 담긴 생산 지역과 포도 품종을 자세히 확인해야 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