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국가와 기업들은 앞다퉈 탄소 중립 목표를 설정하고, 제로 웨이스트에서부터 1일 1 비건 식단까지 실천을 시작하는 개인도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2년 동안 전 세계인을 괴롭히는 코로나 19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연결고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포도 재배도 농업이고, 와인 판매에는 패키징과 운송의 과정이 포함되니 와인을 소비하는 일도 물론 지구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지구를 나눠 쓰는 동식물과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방식으로 와인을 소비할 수 있을까?
<14년간 유기농 포도밭 연평균 13% 증가>
새로운 경향으로 특별히 언급하는 일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이제 오가닉 와인은 우리의 와인 생활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서울에 새로 오픈하는 와인 바 셋 중 둘은 오가닉 와인을 주로 취급하는 것도 같다. 이렇게 오가닉 와인 소비가 늘어나는 지금, 유기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하는 밭은 어디서, 얼마나 늘어났을까?
포도 재배와 와인을 다루는 정부간 국제기구 OIV(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Vine and Wine)은 지난 9월, 유기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하는 포도밭이 유의미하게 늘어났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OIV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 세계 63개국에 유기농으로 포도를 재배하는 포도밭이 있으며 그 면적은 4,540㎢로, 총 포도밭 면적의 6.2%다. 이는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연평균 13%씩 증가한 수치로 2011년과 2014년 사이에 잠시 주춤했지만(연평균 4%), 2014년부터는 다시 매년 8%씩 유기농 포도밭이 늘어나고 있다.
유기농 포도밭을 많이 보유한 국가의 리스트를 살펴보면, 대표적인 와인 생산국이 차지하는 유기농 포도밭의 비율도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유기농 포도밭이 전체의 75%를 차지했고, 와인 생산량도 많지만 일반 식용 포도와 건포도 생산 목적으로도 많은 양의 포도를 재배하는 미국이 세 국가의 뒤를 이었다. 5위와 6위는 각각 터키와 중국이 차지했다.
<밭을 떠난 포도의 여정>
화학비료와 농약, 살균제는 토양의 질을 점차 떨어뜨리고 주변 식수원에 흘러들 위험이 있으니 유기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하는 면적이 느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6.2%라는 비율을 생각해 보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세상 모든 포도가 유기농법으로 재배된다고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포도가 포도밭을 떠난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 그러니까 양조와 패키징, 운반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니까. 포도 속 당분이 알코올로 변하는 발효 과정에서는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고, 양조장의 냉장과 단열에는 합성 냉매가 쓰인다. 간접적인 영향까지 꼽아보자면 셀러를 돌아가게 하는 모든 기계 장치(난방・환기・펌핑)에는 전기가 들어간다. 배럴과 바닥을 청소하는 데 쓰이는 물의 양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포도밭과 양조장은 와인이 남기는 전체 탄소발자국의 3분의 1 정도에만 책임이 있다. 나머지는 포장과 운송의 몫이다. 대부분의 와인이 유리병에 담겨 팔리다 보니, 그 무게 때문에 운송 과정에서 더 많은 가스를 배출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유리병은 재활용이 잘 되는 소재 아니냐고? 기본적으로는 그렇지만, 슬프게도 한국에서는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 유리병은 또 다른 유리병을 만드는 방식으로만 재활용이 가능한데, 아직까지 소주와 맥주 판매량이 압도적인 한국에서 소주병보다 짙은 녹색의 유리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버려진 와인병은 그래서 일반 쓰레기처럼 땅에 묻힌다. 참고로 유리가 자연적으로 분해되려면 약 100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와인을 만드는 환경친화적 방법>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와인 산업은 (다른 모든 산업만큼이나) 지구에 나쁘니 와인을 끊자는 건 당연히 아니고, 조금 더 건강한 방식으로 오래도록 질 좋은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자는 이야기다. 다행히 유기농 포도밭을 늘리는 것 외에도 와인 산업 내에서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배럴과 셀러 청소에 쓰이는 물을 정화해 농업 관개용수로 재활용한다든가, 양조 과정에 쓰이는 전기를 절약할 수 있는 툴킷을 협회 차원에서 제공하는 식이다. 환경적 영향은 적지만 개별적으로 분해하기 어려운 코르크를 모아 재활용 업체에 보내는 스타트업도 등장했다.
와인병 무게로 인한 운송 과정에서의 환경 오염을 줄이기 위해 판매지까지 스테인리스 통으로 와인을 운반하고, 현지에서 보틀링하는 생산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탄소 배출을 40%까지 저감할 수 있다니 여력이 되는 와이너리라면 시도해 봄 직한 방법이다.
스코틀랜드 에버딘에 사는 라세 멜가드와 엘리엇 마틴은 지난해 팬데믹으로 비는 시간이 늘어나자 재미있는 일을 구상했다. 바로 슈퍼마켓에서 팔리지 않고 버려지는 과일들로 직접 와인을 만드는 것. 이들이 세운 투 라쿤스 와이너리(Two Racoons Winery)는 지금까지 4.3톤의 버려진 과일로 1만 리터의 와인을 생산했다. 바나나, 딸기, 블랙커런트 등 포도가 아닌 과일들을 사용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와인보다 과일주에 가깝겠지만, 버려지는 과일을 활용하는 데다 소량의 과육 외에는 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생산한다니 기존 와인 산업에서도 참고할 사항이 있을 것이다.
<고를 땐 신중하게, 마실 땐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럼 우리 소비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와인을 소비하는 게 좋을까? 물론 환경 영향이 적은 방식으로 생산, 운송된 와인을 구입하는 것이 그 첫걸음일 테다. 와인 애호가들에게 그리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종이팩으로 포장된 와인은 그 환경적 영향이 유리병 와인의 5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와인의 맛과 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심미적인 측면도 개선된 와인 전용 종이팩이 하루빨리 개발되길 기도하는 동시에, 피크닉 같은 가벼운 자리에서는 팩 와인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운송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생각하면 가급적 가까운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을 소비하는 것도 도움이 되는데, 이 역시 아시아의 한국에 사는 와인 소비자에겐 너무 가혹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의 와인만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면 운반 방식을 고려해 보자. 통상적으로 육로를 통한 운반이 해상 운반에 비해 환경적 영향이 크다니, 유럽 와인만 고집하지 말고 미 서부 출신의 와인에도 눈을 돌려보자.
물론 일단 만들어져 우리에게 온 와인을 낭비하지 않고 알뜰히 소비하는 태도도 중요하다. 일단 코르크를 뽑은 와인은 길어야 며칠 정도 맛과 향을 유지하니, 그 이후에는 마시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해산물 파스타, 고기 찜 등 요리에 활용하는 건 남은 와인을 처리하는 고전적이고도 기본적인 방법. 그러나 그마저도 너무 오래되어 식초에 가깝게 된 것은 쓰기 어려우니, 미리 얼음 트레이에 남은 와인을 얼려 두었다가 육수처럼 꺼내 써보자.
베이킹 소다와 섞어 프라이팬, 오븐에 눌어붙은 기름때를 제거하는 것도 방법도 있다. 이 외에도 과일 세척에 이용하거나 퇴비에 섞어 식물을 키우는 데 활용하는 등 남은 와인을 재활용할 길은 무궁무진하다. 마시기엔 실망스러운 와인도 다른 데선 빛을 발할 수 있으니, 병을 들고 싱크대로 직행하기 전에 검색부터 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