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길고 지루한 장마였다. 막걸리와 부침가루 매출이 늘어났다는 기사를 보며 한국인들이 얼마나 먹고 마시는 일에 진심인지를 다시금 깨달았고, 회색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색의 미미한 지분에도 가슴이 설렜다. 어두운 날들을 지나 드디어 제습기를 틀지 않고도 빨래가 마를 만큼 날씨가 개었건만 이게 웬걸,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오랜만의 술 약속이 취소되었다. 그러니 별다른 수가 있을까. 3월 이후 내내 그랬듯이 집에서 잔을 채우고 책을 펼쳐들 밖에.
오늘 가져온 소설은 결코 술을 상세하게 혹은 아름답게 묘사하지 않지만 이 더위에도 묵직한 레드 한 병을 따고 싶게 만드는 이상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는 제인 마치와 양가휘가 주연한 영화 <연인>의 원작자로 더 잘 알려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다.
<반짝반짝 빛나는>이 ‘민트 주레프’라는 아주 특정하고 구체적인 이름으로 나를 매혹한 것과 달리,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주인공들은 이름 없는 포도주를 마신다.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와인의 맛이나 향에 대한 어떤 묘사도 없다. 단지 ‘포도주’라는 단어가 셀 수 없이 자주 등장할 뿐이다.
총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줄기차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포도주’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유명 샤토의 명품은 아닐 것이다. 두 주인공이 처음에는 한 잔, 두 잔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취해버릴 때까지 술을 마시는 장소는 어느 항구도시의 노동자들이 드나드는 카페니까. 게다가 이들은 와인의 아로마를 음미하기는커녕 잔이 채워지자마자 목뒤로 넘기기 바쁘다.
이렇게 갈급하게 와인을 마셔버리는 여자의 이름은 안 데바레드. 라코트 제철무역회사 사장의 아내인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마다 도시 반대편의 공장 지대로 간다. 아들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키기 위해서다. 문제의 그날도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아들은 피아노 선생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채 꾸물대고, 선생님은 여느 때처럼 자신의 지긋지긋한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지루하다면 지루하고 평온하다면 평온한 그 순간을 찢어놓은 것은 아래층 카페에서 들려온 여자의 비명소리다.
수업을 마치고 아들과 사건 현장으로 찾아간 안은 카페 안쪽 컴컴한 곳에 쓰러진 여자의 시체를 목격한다. 한 남자가 죽은 여자 위로 몸을 기울인 채다. 카메라를 맨 청년이 들어와 플래시를 터뜨리고,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붉은 핏줄기가 구경꾼들의 눈앞에 선연히 드러난다.
다음날 안은 다시 아들의 손을 잡고 도시를 가로지른다. 금요일이 아니었지만 어제 본 충격적인 장면이, 그 뒷이야기가 못내 궁금했던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포도주’ 한 잔을 주문한 그녀가 자신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카페 여주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신문을 읽고 있던 한 남자가 끼어든다. 대뜸 “당신이 누군지 안다.”라며 운을 뗀 그는 한때 라코트 제철소에서 일하던 쇼뱅이다. 이렇게 공장 지대의 한 카페, 안이 사는 라 메르 가(街)의 정반대 편에서 두 사람은 만난다.
아이도 있는 유부녀가 낯선 남자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행동이야 지금도 환영받지 못하겠지만, 소설 속 안 데바레드는 카페에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유난한 시선을 받는다.
“여자가 카페에 드나들 구실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그래도 전 핑곗거릴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죠. 가령 목이 타서 포도주를 한 잔 하러 간다든가 하는…”
프랑스 여성들은 1944년에 투표권을 쟁취했다. 소설이 쓰인 1950년대 후반은 2차 대전 종전 후 사회 재건을 위한 일자리가 많아지고 여성들의 직업 활동도 늘어나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젊은 상류층 여성이 공공연히 카페에 드나들며 술을 마시는 것은 다분히 눈총 받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카페 여주인은 안 데바레드에게 못마땅하다는 태도로 술을 가져다주고, 다른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자리를 피하라는 듯 계속해서 인근 공장의 작업 종료 시간을 상기시킨다. 사이렌이 울리고, 퇴근 후 카페로 몰려온 노동자들은 그녀의 존재만으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시기의 프랑스가 아이들의 음주에 너그러웠다는 것이다. 학교 식당에서 500ml의 와인(혹은 맥주나 시드르)을 제공할 정도였다. 1956년 8월, 당시 총리였던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Pierre-Mendès-France)가 학교 식당에서의 14세 미만 어린이 대상 알코올음료 제공을 금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학생의 연령을 불문하고 학교에서 술을 전면 금지한 것은 1981년에 이르러서다.)
56년 이후에도 달라진 상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와인-혹은 알코올-이 성장을 촉진시키고 지적인 자극을 준다고 믿었으며, 물보다 청결하다고 생각했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와인을 마시지 못하게 되자 아침에 와인 한 잔을 먹여 보내는 부모도 적지 않았다. 지역이나 가정마다 차이는 있었겠지만,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세상에 나온 것이 58년임을 감안하면 조금 기묘한 일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성장기의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술이 권장되던 사회에서, 상류층 성인 여성이 카페에 드나들며 와인을 마시는 건 손가락질 받을 일이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보자. 죽은 여자는 그 위로 엎어져 시체를 쓰다듬던 남자의 총에 맞았다고 했다. 여자가 죽여달라고 했을 것이라고,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지만 지나치게 열정적인 (그리고 부적절한) 사랑의 결말로 여자는 남자의 손에 죽기를 원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안과 쇼뱅은 사건의 전말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그 사이사이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술을 마신다. 독자 입장에서는 누가 만든 와인인지, 포도 품종은 무엇인지, 심지어 레드인지 화이트인지조차 알 수 없는 ‘포도주’를.
그러나 나는 이 와인이 적어도 레드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이제 막 더위가 시작되고 ‘해가 길어’지는 시기임이 드러나지만 그래도 화이트는 아닐 것이다.
그 여자가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키자, 다시금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금세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서서히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 해가 미처 지기 전에 묵직한 레드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고 상상해보자. 기분이 빠르게 들뜨지만 이내 몸이 무거워지고 얼굴은 붉게 물든다. 지루할 정도로 단정한 생활에 익숙한 안 데바레드가 카페에서 낯선 남자와 밀담을 나누며 억눌렀던 욕망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게 하려면 그 정도의 자극은 필요하다. 청량한 화이트나 가벼운 로제로는 역부족이다.
“입가에 흐르는 피” 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여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죠. 끌어안고서 말이에요.”
고도가 낮아질 대로 낮아져 이제 막 넘어가려는 저녁 해가, 그 남자의 얼굴에까지 비쳐들었다. 그는 카운터에 살짝 기대어 서서 벌써 아까부터 온몸으로 석양빛을 받고 있었다.
그 여자의 입술은 좀 전에 마신 술 때문에 촉촉했다. 그 입술은 은은한 노을빛 아래 가혹하리만치 또렷한 윤곽을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재구성 – 혹은 재현 – 하고 있는 사건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면 이 믿음은 더욱 확고해진다. 죽은 여자의 입가에 흐르던 피, 두 사람을 감싸는 석양빛, 술에 젖은 입술이 노을에 닿아 또렷하게 빛나는 모습. 포도주는 명백한 피의 은유다. 안의 입가를 적신 포도주는 붉은빛일 수밖에 없다.
총 다섯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동안 안은 점점 포도주 맛을 알아간다. 처음에는 목이 타서, 그다음에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마셨다지만 세 번째 방문에 이르러서는 ‘포도주 맛에 눈을 뜨기 시작해서일 뿐 다른 이유라고는 전혀 없’이 기갈 들린 듯 술을 들이켠다. 네 번째 만남에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술과 대화에 취해 있다가 자기 집에서 열리는 디너파티에 지각하기까지 한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집에 당도한 안은 파티에서도 계속 와인을 마신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예외적으로 단 한 번, 와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 장면이다.
안 데바레드는 쉬지 않고 술을 마신다. 오늘 밤의 포마르 주에서는 거리에서 만난 낯모르는 사내의 입술 같은 견딜 수 없는 맛이 가시지 않는다.
포마르(Pommard)는 부르고뉴 코트 드 본에 위치한 마을이다. 피노 누아 100%로 만든 레드 와인만이 포마르 AOC를 달 수 있으며, 샤르도네나 피노 블랑 등 화이트 품종 재배가 가능하고 15%까지 블렌딩도 할 수 있지만 그 경우 레이블에 ‘포마르’라고 기재할 수는 없다. 그랑 크뤼는 없으나 28 개의 1급 밭들이 엄격한 기준을 고수하고 있는 이 마을은 코트 드 본에서 가장 묵직하고 진한 와인을 생산하기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트렌드에 따라 우아하고 부드러운 스타일로 변모 중인 도멘들도 있다지만 소설이 출간된1958년의 ‘포마르 주’는 그 힘과 기세를 단단히 유지하고 있을 테다. 제철소 사장이 주최하는 디너파티이니 레 제프노(Les Épenots)나 레 루지앵(Les Rougiens) 같은 최상급 포마르가 테이블에 올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밤의 안에게는, 공장 지대 카페에서 마신 이름 없는 ‘포도주’나 고상한 ‘포마르 주’나 ‘거리에서 만난 낯모르는 사내의 입술 같은 견딜 수 없는 맛’이 나기는 매한가지다. 정원의 목련은 짙은 향을 내뿜고, 안은 연어나 오렌지 소스를 곁들인 오리 같은 호화로운 음식을 소화시킬 수 없어 연신 와인만 입으로 가져간다.
뒤늦게 나타나 평소 같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안이 취한 채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손님들도 남편도 눈치채 버렸다. 이제 아이의 피아노 교습에는 다른 사람이 동행할 것이다. 안은 마지막으로 쇼뱅을 만나러,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 없이 혼자서 카페로 간다. 인근 공장의 작업 종료 시각이 다가오지만 카페 여주인은 이제 안 데바레드가 카페에 얼마나 더 머물지 신경 쓰지 않는다. 안과 쇼뱅은 다시 포도주를 마시고 그들의 손이, 잠시 후에는 입술이 포개어진다. 여주인은 청하지도 않은 포도주로 그들의 잔을 채워준다. 이어 한무리의 남자들이 카페 안으로 들이닥친다. 쇼뱅은 말한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안은 대답한다. “그대로 되었어요.” 그녀는 카페를 나서 온몸으로 붉은 노을을 맞이한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1960년에 영화화 된다. 연극 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인 피터 브룩이 연출을, 2017년 타계한 ‘누벨바그의 배우’ 잔느 모로가 안 데바레드 역을 맡았다. 유튜브에서 이탈리아어 버전으로 영화 전체를 볼 수 있는데, 덕분에 소설 속 포도주가 레드일 것이라는 내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흑백영화이긴 하지만, 카페에서 안의 잔을 채운 것이 짙은 색의 액체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많은 부분을 불분명한 채로 남겨둔다. 안과 쇼뱅이 사는 이 항구 도시가 어디인지, 안이 사랑해 마지 않는 아들의 이름은 무엇인지, 심지어 그녀가 그토록 집착했던 치정 살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까지도. 서사를 전개하는 원동력인 포도주의 정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래서 독자는 이 수수께끼 같은 요소들에 집중하게 되고, 안 데바레드처럼 갈증이 나 못 견디겠다는 듯 와인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와인을, 술을 마시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금기를 넘어서고, 내가 속한 것과 다른 세계를 만나려는 욕망에 대해서.
*본문 인용: 마르그리트 뒤라스, 정희경 역, «모데라토 칸타빌레», 2001,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