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약간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화제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을 보았다. 보려고 기다렸던 영화도 아니고, 딱히 신카이 마코토의 팬도 아니라서 영화관에서 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가족끼리 보는 주말 영화 선택은 확실히 변수가 끼어들 여지가 많다. ‘주변에서 그렇게 재미있다더라’로 시작된 제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입소문이 무섭다.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길게 서술하지 않겠다. 이 글 자체가 그러자고 쓰는 것도 아니니까. 감상을 짧게 남기자면, 소재는 진부했고(개인적으로는 지브리가 다루는 폭넓은 주제들이 그립다.) 감정선과 그 외에 표현에 있어 익숙하지 않은 일본식 문법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뮤지컬 영화도 아닌데 이야기 중간에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배경음악은 흐름을 끊고 자는 사람을 깨우듯 ‘넌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를 지각시킨다. 물론, 화면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고…. 한 번쯤은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영화에서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카페 문화’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은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으며 방과 후 카페에 갈 약속을 잡는다. 방과 후 그들은 화려한 팬케이크와 음료를 우아하게 즐긴다. 고등학생들이, 그것도 남학생들이! 새로운 카페가 생겼다 한들 거기에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익숙지 않은 광경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 남자 고등학생들의 방과 후 일상은 학원이나 야간자율학습, 혹은 PC방으로 집약된다.
성에 따른 역할의 차이를 활용해 재미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 카페는 오히려 남학생들이 카페 문화를 즐김으로써 그러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듯하다. 그보다는 카페가 보편적인 도시의 문화생활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된다는 점을 탐구해보자. 시골에 사는 여자 주인공은 카페를 동경하는데, 술집은 두 개나 있어도 카페는 없는 인구 5백의 시골 동네에 카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산토리 Suntory 사의 캔커피 상표 BOSS가 그려진 자판기 하나와 벤치 하나는 있지만, 이것은 소녀에게 카페가 아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라기보다는 일상을 향유하는 문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글을 쓰기 전에 일본의 친구들 몇몇을 인터뷰했다. 물론 ‘고등학교를 다니는 남학생에게 카페가 보편적으로 여가를 활용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쿄의 학생들이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 나왔듯이 도시적인 것을 상징하는 것 같고. 어디에 사는지나 소득의 차이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 같다.'(A, 28)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카페 문화는 프랑스에서 유래했지만, 영국식 티타임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인의 삶 속에서 변형되어 이제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끼니와 끼니 사이에, 그리고 주로 햇살 따스한 오후에, 기분을 고양하는 인테리어와 음악이 있는 장소에서, 따뜻한 차나 커피와 함께 식사의 끝을 장식하던 디저트가 자신만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또한 이 문화는 도시와 함께한다. 카페는 정해진 시간표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바쁜 하루 속에서 짬 시간을 이용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여유 가득한 시골에서 카페의 존재 의미가 희석되는 이유다. 특별한 날 즐기는 문화라기보다는 일상의 문화이며(물론 그리 즐기기 위해서 아르바이트가 필요하지만), 도시에 사는 남자 주인공에겐 학교와 집, 혹은 학교와 아르바이트 사이 여가를 즐기는 방식이다.
「너의 이름은」은 잘 만든 애니메이션일 뿐만 아니라 카페 문화를 다채롭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더 제안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디저트들은 일본 내에서도 꽤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카페에서 주인공이 먹었던 메뉴들을 재현해서 sns에 올리는 팬들도 많고, 이케부쿠로 파르코에 위치한 ‘The Guest’라는 곳에서는 영화 속에 등장한 메뉴들을 한정 메뉴로 제공하는 행사를 올해 2월 7일까지 진행하고 있다. 궁금한 분들은 안내 페이지를(링크: https://the-guest.com/kiminona_ikebukuro/)를 클릭!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메뉴를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영화 속 한 장면의 아름다움을 담은 라테를 개발한다든지, 독특한 시도들이 줄짓고 있다. 사람이 많이 몰릴 것을 대비해 줄 서는 방법까지 안내한 디테일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데 대체 이쑤시개를 꼽은 피자는 왜 만드는….)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국은 디저트 브랜드의 무덤’이라는 기사(링크: https://news.joins.com/article/21060250)를 보고 시작된 생각이 「너의 이름은」을 보며 정리를 마쳤기 때문이다. 기사는 유독 한국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디저트 브랜드들을 다룬다. 세계적인 명성의 피에르 에르메를 비롯한 많은 디저트 브랜드들이 실제로 한국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한국에서 고급 디저트가 어려운 이유를 1) 비싼 가격 2)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 3) 부드러운 식감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입맛 4) 단맛을 싫어하는 한국인의 입맛으로 정리했다.
과연 그런가? 이용재 평론가는 비싼 가격이 문제가 되는 것을 두고 현재 한국의 소비자에게는 돈과 취향이 부족하며, 한국은 특정한 디저트 소비 형태가 설립되지 않은 문화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디저트는 ‘잉여’의 문화이고, 세계적으로 줄어드는 추세까지 보태져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한다. 이수부 셰프는 디저트 브랜드들이 순수한 사업 계획의 일환이라기보다는 백화점/쇼핑몰 판촉의 일환으로 들어오는 것과(사업성 검증의 부족), SNS의 발달로 너무 많은 갈래의 주관 평가들이 떠도는 현상을 어려움의 이유로 덧붙인다.
그러나 필자는 디저트 실패의 핵심은 한국의 카페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며, 일상의 여유 없음이 그 이유라고 본다.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파인 다이닝이 아닌 이상 디저트는 ‘식사의 끝’보다는 간식에 가깝다. 카페에서 소비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당연히 카페 문화를 따라가는 것이며, 그 문화가 다르면 디저트의 소비도 달라진다.
카페가 하는 역할이 언뜻 보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해 보이지만, 다시 한번,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장소만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카페 문화에는 여유가, 특히 일상의 그것이 빠져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주중 보다 주말의 시간으로 채워지는 공간이고, 직장인의 점심시간에도 짧은 시간에 부랴부랴 커피를 받아 들고 나서야 하는, 테이크아웃이 주를 이루는 제조의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많은 이들에게는 카페가 업무의 공간 그 자체이다. 디저트가 끼어들 공간 따윈 없다.
그래서 쉬는 주말 브런치에 팬케이크는 먹어도 평일 오후를 책임지는 달콤한 팬케이크는 먹지 않는다. 일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신규 브랜드는 꽤 높은 가격으로도 팔리지만 충분히 증명사진을 남기고 나서는 가치를 상실한다. 그나마 백화점 식품관에서 테이크 아웃으로 판매되는 디저트는 멸종 위기에 처한 프리미엄 디저트 시장의 명맥을 유지하려 끊임없이 변모하고 소비자들의 틈새 여유시간을 공략해보지만 그 여유조차 대한민국 현대인에게 부족한 이 시점에는 대책이 없다.
시장은 절대 작지 않다. (대만을 보라.) 결국 디저트가 어려운 것은 한국의 도시인이 일상 속에서 여유를 상실하면서 카페 문화도 변형(혹은 상실) 되었기 때문이다. 카페 문화의 이러한 변형은 디저트가 소비 가능한 시나리오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증’의 대상을 넘어 조금 힘들었던 하루를 달래주거나 하는 역할은 상상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평일 한국인의 여유(혹은 여가) 시간은 고작 세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인의 일상은 그보다 더 바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문뜩 드는 생각이다. 「너의 이름은」의 배경이 한국이었다면 시골에 사는 주인공은 도시생활의 어떤 면을 부러워했을까?
참고문헌
손가인, ‘못 쉬는 한국인, 10년 전보다 여가시간 줄어’, 동아일보
송정, 세계적 마카롱·수제팝콘마저…한국은 디저트 브랜드의 무덤?, 중앙일보
이용재 블로그, 고급 디저트와 소비의 삼각형 https://bluexmas.com/20236
이수부 블로그, 디저트 브랜드의 무덤 한국? https://blog.naver.com/lovingwood/220898372307
나무위키, 너의 이름은 항목
통계청, 1인당 커피 소비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