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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T Hiking 2018_06 – 친구가 생겼다

PCT Hiking 2018_06 – 친구가 생겼다

선경 고 2018년 7월 31일

Wright Wood 594.6km~Acton KOA~Hiker Heaven(Agua Dulce)~Casa de Luna 769.6km

4/25 수

이틀을 머문지라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하나둘씩 출발 준비를 한다. 매일 20km 이상을 걷던 사람들이라 하루 반나절만 쉬어도 몸이 근질근질 해진다. 순서나 일행 여부에 상관없이 먼저 떠나는 이도 있고 나중에 떠나는 이도 있다. 인사는 언제나 See you on the trail. 걷다 보면 언제든 다시 만날 테니까.

몇몇이 떠나고 나자 같이 머물렀던 한국인 하이커가 배낭을 체크 해 달라기에 실제 하이킹할 때처럼 짐을 전부 넣고 베란다로 나오라고 했다. 마라톤은 여러 번 했지만 산행이나 산에서 캠핑한 경험이 없어서 장비들에 대한 요령이 부족한 걸 내가 봐 주기로 했었다. 등판 길이와 어깨끈, 허리벨트의 위치, 매는 법 등을 봐 주고 신발에 대한 이야기도 몇 가지 해 준 뒤, 아침을 먹으러 나간다기에 그제 우리가 갔었던 레스토랑을 추천 해줬다. 트레일에서 보자는 인사와 함께.

삼십 분쯤 뒤, 나도 준비를 마친 하이커 두 명과 함께 숙소를 나와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지나가는 차들이 세워주지 않아 한참을 기다렸는데 바로 뒤, 슈퍼 쪽에 있던 차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묻는다. 트레일에 가느냐고. 그렇다고 했더니 데려다주겠단다. 도롯가에 서 있던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차를 얻어타고 트레일로 복귀했다. 보통 우리가 ‘Hiker friendly’ 하다고 표현하는 곳이 있는데 슈퍼일 경우 하이커들에게 필요한 식량들-즉석식품, 칼로리 높은 에너지바 등-이 많은 곳, 마을의 경우 히치하이킹이 잘 되거나 지나가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먼저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이곳 라이트 우드는 굉장히 친절한 편이어서 오전 중에는 지나가는 차가 먼저 서서는 트레일에 돌아가느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배낭을 메고 있지 않은데도.

오늘 산행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초반에 작은 산을 하나 넘은 뒤 1000m 가까이 고도를 올려 2867m 높이의 Mt. Baden-powell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마을까지 갈 식량이 가득한 탓에 마을을 떠나온 날의 배낭이 가장 무거우니 만만치 않은 산행이 될 것이다. 시작부터 힘겹게 작은 산을 넘자 도로 옆에 주차장이 있다. 좀 쉬면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출발하려 했는데 먼저 도착한 하이커 Salmon이 지역 산악 공원 관리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같이 어울려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는데 그들에게도 PCT thru hiker는 낯선 모양이다. 그들로부터 오늘 가려는 리틀 지미 캠프그라운드에 베어박스 Bear Box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Bear Box는 캠핑장 내에 마련된 철제 보관함인데 음식들을 넣고 잠글 수가 있어 곰이 음식을 먹지 못하게 막아준다. 그 말인즉슨 그 근처에 곰이 나타난다는 이야기겠지. 사전에 정보를 찾아볼 때도 오늘 목적지인 캠핑장은 해마다 곰에 관련된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에게 물었었는데 먼저 도착해 이야기를 나누며 문의했었는가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많은 하이커들이 속속 산을 넘어 도착하고, 나는 몸이 점점 식어가고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인사하고 먼저 출발을 했다. 하지만 오늘도 뒤늦게 출발한 하이커들이 날 잘도 추월해간다. 더군다나 길도 이제까지의 PCT와는 조금 다르게 경사가 있는 편이라 나는 여지 없이 꼴찌로 뒤처진다. 그 김에 다른 이들이 올 때마다 길 한쪽으로 비켜서서 주변을 감상하며 숨을 좀 돌린다. 이틀 전, 그리고 오늘 걸었던 길들이 점점 발아래로 내려가고 시야가 트인다. 바람도 상쾌하니 굳이 서둘러 갈 필요를 못 느낀다. 어차피 저녁이 되면 다 같은 곳에서 만날 테니까.

쉬엄쉬엄 정상 근처의 PCT trail에 도착해 배낭을 내려놓고 얼마 되지않은 정상을 향해 달리다시피 올라간다. 고산증(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2500m 내외에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한다고 한다)이 느껴질 높이지만 배낭을 내려놓은 가벼움은 그 걱정마저도 날려버렸다. 정상에 도착해 먼저 가 있던 하이커들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남기고 주변을 둘러본다. 희뿌연 스모그가 끼어서 시야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정상에서 보이는 방향으로 저기가 LA 북부인데 날씨 좋으면 다 보이는데 오늘은 스모그가 많아서 안 보인다거나 저 멀리 모래가 가득한 사막 근처가 우리가 갈 곳이라거나 하는 등 주변 지역에 대해 알고 있는 친구가 내게 설명을 해 준다. 설명을 해 주니 열심히 듣는 척은 하지만 사실 어디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마운틴 베든 파웰 정상

정상에서 내려와 간단한 행동식(이동하면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스낵이나 초콜릿 종류를 말함)을 먹고 오늘의 캠핑장을 향해 출발했다. 다들 지나가면서 내게 그곳에 갈 거냐고 묻는다. 마음 같아서는 ‘Yes’하고 싶지만 스스로의 체력에 대해 확신이 없으니 ‘Try’라고만 이야기한다. 다들 웃으며 캠핑장에서 보자고 인사를 하며 멀어진다. 무거운 배낭에 땅만 보며 걷고 있는데 눈에 익숙한 모자가 땅에 떨어져 있다. 혹시 몰라 주워들고 엉덩이 붙일 틈도 없이 열심히 달리다 보니 저 아래쪽에 하이커들이 모여있다. 캠핑장 가기 전의 마지막 물 공급지다. 오늘 남은 하이킹 거리동안 마실 물과 저녁을 만들 물, 그리고 내일 물이 있는 곳까지 갈 동안 필요한 용량까지. 꽤나 많은 양의 물을 짊어져야 했다. 다행인 건 캠핑장까지의 거리가 10여 분도 안된다는 것. 배낭을 놓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물 백을 들고 내려오는 하이커들이 ‘거의 다 왔어~’, ‘바로 저기야’ 라며 격려 해 준다. 그래도 여전히 숨이 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캠핑장에 도착해 텐트를 칠 자리를 정한 뒤, 모자 주인을 찾았는데 이곳에 없다. 분명 내 앞에 가고 있었을 텐데 왜 없는지 의아하다. 다른 이들에게 물으니 어제 마을에서 새 신발을 구입한 친구라 힘이 펄펄 넘쳐서 새 트레일을 찾아갔다며 웃어 재낀다. 아마도 갈림길에서 다른 곳으로 잘 못 갔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을 먹는 동안 다른 길로 갔다가 되돌아온 하이커 두 명이 트레일 쪽에서 올라오고 있다. 다들 환호와 박수로 맞이한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겪은 두 사람을 격려 해 주는 게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길을 잘 못 들어 갔던 길을 되돌아와야 한다니… 나 역시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처 질 정도로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저녁을 먹느라 같은 테이블에 앉은 한 하이커가 ‘이 그룹은 진짜 멋지네’ 라고 한다. 모자를 건네주니 안 그래도 잃어버려서 마음이 상해 있었는데 고맙다며 환하게 웃는다. 작은 것 하나에도 웃게 만드는 서로가 어느새 마음 든든한 친구가 되었다.

4/26 목

트레일에서는 사실 알람이 필요 없다. 해가 서서히 밝아오면 누군가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하고 그 소리에 다들 하나둘씩 일어나 아침을 먹거나 출발 준비를 한다. 오늘도 여느 때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준비를 하는데, 어제 같이 묵었던 한국인 하이커는 벌써 떠나고 없다. 다른 이들과 아침 인사를 하며 떠나는 이들에게는 저녁에 보자는 인사를 건넨다. ‘오늘 얼마나 갈 거야?’ ,’글쎄, 어디쯤에 큰 캠프 사이트가 있더라고’라고 이야기가 진행되면 그 날 걸을 거리가 어느새 정해진다. 인원이 많다 보니 텐트를 칠 공간이 넉넉한 곳 즈음에서 멈춰 다들 만나 저녁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게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과다. 처음엔 나도 그들과 몇일 정도만 어울리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참 빠르고 강하지만 나는 느리게 가니까. 그런데 라이트 우드 마을에 들어가기 몇일 전부터 그렇게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고 또 마을을 떠나와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다들 나 또한 그들의 일행이라 생각하는 모습이다.

멋진 풍경을 만나면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그늘이 나타나면 같이 쉬면서 간식도 먹고 수다도 떨고, 저녁에는 만나서 텐트 치고 둘러앉아 ‘너 뭐 먹니’, ‘오늘은 어땠니’ 물어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도 곁에 있는 다른 하이커들에게보다 반갑게 큰 소리로 인사하고, 멈춰 서서 잠깐의 수다도 떤다. 다른 하이커들 역시 그 모습을 보며 당연히 내가 그들과 일행이라고 생각한다. 같이 준비하고 떠나온 것은 아니지만 길 위에서 이렇게 만나 많은 시간을 공유하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혼자가 아닌 친구들이 생겼다.

그 친구들을 오늘은 점심때가 조금 지났을 즈음 도로 옆 어느 피크닉 에리어에서 만났다. 간이 화장실도 있고, 피크닉 테이블도 있어서 다들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도착해 들어보니 이 앞쪽이 개구리 보호구역이라 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있다는 것이다. 해서 일정 거리를 도로를 따라 걷다가 PCT와 만나는 트레일이 있는 곳에서 산으로 돌아가 PCT를 향해 하이킹을 해서 트레일에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다들 내가 먹는 초코바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즐겨 먹는 것이지만 그것을 먹었을 때의 나의 반응이 궁금한 거다.

이들을 만나고 난 뒤, 그들은 내가 무엇을 먹는지 신기해하고, 자기들의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꼭 어떤지를 물어본다. 자신들이 먹는 스낵이나 음식들도 먹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는 내가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하면 먹어보라며 권한다. 나 역시 새로운 음식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터라 늘 사양하지 않고 잘도 받아먹는다. 오늘의 초코바는 실패. 너무 달아서 한 입 깨문 것조차 삼키기가 어렵다. 그래도 버릴 순 없으니 먹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 초코바 역시 며칠씩 걸을 거리에서 나의 식량 계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니 먹지 않는다면 한동안 배고픈 하이킹을 하게 된다. 다들 이 초코바를 너무 달아 한다는 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길래 한국에서 와인 세미나에 갔을 때 이야기를 해 줬다.

호주 와이너리 오너가 하는 세미나에서 유독 한 와인만 당도가 높아 세미나 끝의 질의 시간에 그 이유를 물으니 미국에 수출할 목적으로 만든 와인이라 그렇단다. 미국인들은 음식을 전체적으로 달게 먹는 편이라 와인도 당도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자 다들 수긍을 한다. 나는 그 모습이 더 신기하다. 스스로가 달게 먹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달게 먹는 사람들이라니. 그렇게 수다를 떨며 에너지를 보충하고 우회도로를 따라 하나둘씩 출발을 했다.

우회로 안내 표지판

한참을 걸어 겨우 PCT 와 만난 뒤 첫 CG인 cooper canyon CG에서 햇볕에 배낭을 내려놓고 발에 잡힌 물집을 치료했다. 양말과 신발이 모두 바뀌고 나서 발에 먼지가 많이 들어가 물집이 잡혀 심할 때는 걷기가 불편할 정도다. 그래도 어쩌랴, 열심히 걸어 하루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을. 일행이 알려준 곳에서 물을 길어 정수를 한 뒤 잠깐 숨을 돌리고 다시 출발 준비를 한다. 그러는 사이 도착한 다른 하이커에게 들으니 몇몇 일행은 도로를 따라 걷는 것이 싫어 히치 하이킹으로 일부 거리를 스킵한다며 뒤에 남았단다. 결국 먼저 와 있던 세 명과 나, 그리고 뒤따라 온 하이커 이렇게 다섯만 이 구간을 걸은 셈이 되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 인사를 하고 먼저 출발했지만 역시나 금세 또 따라잡히고 만다. 이젠 그들이나 나 모두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지나쳐 간다. 곧 또 만나게 될 테니까.

더운 날씨에 물의 무게가 추가되니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 유난히 더 힘들다 싶어 슬슬 자괴감이 밀려오려 할 즈음, 시간과 거리를 보니 1시간에 4km 가까이 걸었다. 이젠 속도감까지 없어져 가는가 보다. 또 혼자가 돼서 열심히 가다가 오늘은 어디에 텐트 쳐야 하나, 시간이 어떻게 되나, 애들 간다는 캠핑장까지 갈 수는 있으려나 고민하면서도 계속 가다 보니 어느새 일행들이 간다는 캠핑장 갈림길까지 왔다. 길이 잠깐 헷갈려 갔던 길을 되돌아오긴 했지만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캠핑장에 도착했다. 곰이 나온다니 웬만하면 그들과 같은 곳에 머물고 싶었는데 다행이다.

다들 도착한 지 오래되었는지 음식 먹은 것을 정리 중이거나 잠자리를 이미 세팅한 상태다. 다른 사람들과 인사하고 텐트 먼저 치고 있는데 처음부터 같이 걸었던 하이커 SUNSHINE이 와서 SALMON이랑 자기가 나의 트레일 네임 생각 해 봤단다. 의견을 나눠 본 바 두 가지로 압축되었는데 선택은 나에게 맡기겠다며 보기를 준다. Chef or Noodel? ‘왜?’라고 물으니 물으니 ‘Chef’는 저녁마다 새로운 음식을 해 먹어서 그렇고 Noodel은 한국 면을 자주 먹어서 그렇단다. 아무래도 어감상 Noodel보단 Chef가 더 나은 것 같아 이야기했더니 다른 하이커들의 의견도 대부분 Chef가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단다. 그렇게 내게도 트레일 네임이 생겼다. 친구가 생기더니 트레일 네임까지 얻고, 왠지 한 단계씩 진짜 하이커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4/27 금

사막의 꽃을 보는 재미가 사라졌다. 오기 전에는 나도 ‘사막’이라서 사하라 사막처럼 모래만 잔뜩 있거나 미국 서부 영화처럼 황량한 허허벌판이기만 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곳에도 꽃과 나비와 벌이 있어 간간히 보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다만 고도가 올라가니 침엽수들이 자라고 엄청 큰 솔방울들이 길가에 가득한 대신에 꽃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홀로 피어 있는 꽃들을 보면 눈이 다 행복해진다. 주변에 같은 종류 식물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찌 저리 홀로 자라 꽃을 피웠을까. 장하네. 오늘도 역시 아침부터 기온이 높고 덥다. 그러다 고도가 높은 산이 올라가니 살랑살랑하고 가끔 부는 바람에 실려 오는 나무 냄새가 발길을 붙잡는다. 주변에 향기 좋은 오래된 나무라도 있으면 잠시 멈추고 심호흡하며 그 깊은 향기를 깊숙이 들이마신다. 한국에서도 이곳에서도 오래된 나무가 뿜어내는 향기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몇일 전부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새삼 음악의 힘이 대단함을 느낀다. 그 리듬에 따라 걸음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고 생각지 못했던 오래된 추억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헌데 익숙해지는 것의 무서움 또한 음악을 들으며 느꼈다. 분명 듣고 싶은 음악을 순서를 건너뛰고 플레이 시켰는데 걷다 보면 다른 노래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만큼 걷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어제, 오늘 연달아 이틀 동안 잘 가는 하이커들 무리를 쫒아 38.2~3km를 걸었더니 오늘은 왠지 기운이 나질 않는다. 그나마 좋지 않은 양말도 수명을 다해 가는지 발에 모래가 너무 들어와서 이미 발가락 사이 피부가 다 너덜너덜 해졌다. Big Bear Lake 이후부터는 물집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생겨서 참고 걷다가 길가에서 터뜨려 밴드와 테이핑으로 양쪽 엄지, 검지 발가락 감싸서 손 보고 운행했다. 발도 너무 미끄러워서 결국 신발 끈 다 풀어서 다시 꽉 조여 매고 걸었다.

마지막 5km는 너무 힘들어서 앞으로는 일행들을 못 쫓아가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중간에 소방서에서 물 5.5L를 채워서 배낭이 무거우니 속도도 못 내는데 평소 걷던 것보다 빨리 걸었으니 체력이 남아나질 않는 게다. 게다가 발목과 무릎이 시큰거리 시작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어둑해져서야 겨우 일행들이 밥을 먹고 있는 캠핑장에 도착했다. 텐트를 치고는 식사 준비를 하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뭔가 축축하다. 급히 살펴보니 정수기와 셋트인 수낭이 찢어져 물이 조금씩 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저기 물투성이다. 맙소사. 다행히 물을 넉넉히 챙겼고, 배낭 안의 물건들은 방수 백에 넣어놓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당분간은 물을 정수할 때 조금 불편할 것 같다. 마을에 들어가면 물병도 새로 사야겠다.

4/28 토

오늘까지 딱 한 달째 걸었다. 어제는 평소보다 길게 오래 걸은 데다 배낭도 물의 무게가 더해져 무거웠던 탓에 체력 소모가 컸다. 그런 날은 밤에 잘 때 유난히 추운데 어젯밤에는 바람까지 불어서 가지고 있던 핫팩을 뜯어 품고 잤다. 덕분에 추위에 떨지 않고 잘 잤다. 그런데 다들 아침 식사는 어찌 해결들 하는지 눈 뜨자마자 30분 이내로 후딱후딱 정리가 끝나 오늘도 나는 출발이 늦다. 물론 나보다 늦게 출발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걷는 속도가 무척 빨라 아침 여유를 즐기는 것이라 나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사실 오늘은 일정 자체가 다른 일행들과 다르다. 난 오늘 KOA(체인형 CG)까지만 갈 거니까.

그곳에 트레일 시작 전에 보내놓은 재공급 박스가 있다. 다른 일행들은 그곳에서 시원한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즐긴 뒤 다음 마을인 Agua Dulce까지 바로 간단다. 그런데 여유가 있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아니면 체력이 그만큼 떨어진 것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걷는 것이 힘들다. 게다가 바로 언덕 아래에 목적지가 보이는데 길은 구불구불 이 언덕, 저 언덕을 자꾸 돌아서 간다.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지만 그래도 PCT라고 쓰여 있어서 꼬박꼬박 제대로 돌아 내려왔다. 중간에 들렀던 노스 포크 레인저 스테이션에서 음료와 스낵의 트레일 매직으로 기운을 얻지 않았다면 지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행이랑 같이 보낸 덕에 내가 하루에 40km를 갈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계획을 더 잘 세울 수 있겠다.

휴대폰 신호가 잡히는 곳에 오자, 지난번 마을에서 만났던 하이커에게 카카오톡이 와 있다. 너무 반갑고 정신이 없어 이야기만 나누고는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사실 나도 그와 헤어진 뒤 내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었어야 하는데…’하며 아쉬워하던 터였다. 일행들이 향한 다음 마을에 있다 하니 내일은 조금 서둘러 걸어봐야겠다. 샤워실이 다 사용 중이라 기다리는 동안 양말을 먼저 빨았다. 햇볕 좋을 때 빨리 빨아서 말려두어야 발 상태가 그나마 더 나빠지지 않을 것 같아서. 빨아도 빨아도 구정물이 계속 나온다. 양말 사이사이 낀 먼지와 모래 때문에 발이 더 엉망인 것만 같아 직접 손으로 빨았는데 생각을 잘한 것 같다. 따가운 햇볕에 보송보송 잘 말라다오~

샤워 후 음식을 먹으며 인터넷을 확인하니 엄청난 뉴스가 온라인을 덮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단다. 서둘러 유튜브로 영상을 찾아보다 눈물이 왈칵 났다. 안 그래도 이곳 캠핑장 사장님이 한국분이라 매점 내에 한국 과자며 음식들이 있어 그리움에 마음이 울컥했는데… 나라 떠나면 다 애국자라더니 딱 그 꼴이다. 유난히 한국이 그립고 자랑스러운 밤이다.

4/29 일

Hiker Heaven. 하이커 헤븐. 총 4300km의 PCT에는 유명하거나 혹은 숨겨진 Trail Angel House가 있는데 이곳 하이커 헤븐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이름도 오죽하면 하이커 헤븐일까.

아구아 둘체 마을에는 하이커 헤븐으로 가는 안내 표지판도 마련되어 있다

점심 때쯤 도착한 마을 Agua Dulce에서 마침 하이커 헤븐과 마을의 슈퍼를 왔다 갔다 하는 셔틀에 아는 하이커가 타고 있어서 지나가다 픽업을 당했다. 하이커 헤븐 갈 거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타라고 한다. 하이커 헤븐에 도착하니 운전해줬던 자원봉사하는 하이커가 안내 해 주는데 입구 쪽엔 세탁할 동안 입을 수 있게 갈아입을 옷을 사이즈/종류별로 정리해 놓았고, 수건도 사용할 수 있게 그 옆에 잘 개어서 놓아두었다. 세탁물은 그물망에 담아서 포스트잇에 그물망 번호랑 이름 써서 넣은 다음 창고에 가져다 놓으면 세탁해서 게스트 하우스 입구에 놓아 준단다.

미싱이랑 컴퓨터도 있고 창고에는 하이커 각자가 보낸 소포가 알파벳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마을에 있는 식당 안내와 큰 장비점인 REI갈 사람 모집하는 화이트보드에 이름 쓸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차량은 각자 알아서 수배해서 쉐어링 해야 하지만 꼭 필요한 이런 정보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하이커들을 붙잡고 일일이 물어봐야 할 테니까. 별도의 건물에 마련된 게스트 하우스에는 샤워실이랑 거실, 주방 있고 냉장고도 쓸 수 있다. 꼭 진짜 호스텔이나 게스트 하우스 같네.

게스트 하우스 앞에는 테이블이 몇 개 있어서 거기 앉아 뭐 먹으며 수다도 떨고 하네. 완전하게 하이커 맞춤형으로 꾸며진 장소다. 건물 넓이의 대여섯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마당에는 각자 텐트를 칠 수 있는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다들 나란히 줄 맞춰 텐트를 쳐 놓았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하이커들이 모여야 하니 알아서들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마침 어제 카톡을 주고받았던 한국인 하이커가 떠나기 직전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아쉬운 마음에 어제 받은 재공급 박스에서 꺼내 따로 빼 두었던 한국 음식 몇 가지를 건넸다. 그래봤자 라면에 고추장 등이지만 없으면 또 그리운 게 바로 두 가지 아니던가. 그리곤 역시나 인사는 See you on the trail.

그가 남기고 간 책을 하이커 박스에서 꺼내어 챙겨둔 뒤, 샤워 후 다른 하이커들과 함께 3시간여 거리의 큰 장비점으로 향했다. 무엇보다 새 양말이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양쪽 발의 피부가 다 벗겨져 하이킹이고 뭐고 주저앉게 생겼으니. 장비점에서 각자 필요한 것을 구입한 뒤, 재공급을 위해 근처의 큰 마트로 향했다.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까. 그동안 들렀던 작은 마을의 마트에 비해 훨씬 저렴한 와인 가격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참지 못하고 세 병을 구입했다. 한 병은 오늘 저녁에 숙소에서 마시고 나머지 두 병은 플라스틱 통에 옮겨 내일과 모레 하이킹하는 도중에 마셔야겠다. 인적 없는 산에서 먼 산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와인 한잔하는 것을 꿈꾸었는데 드디어 내일 그 꿈을 이루게 생겼다. 비록 비싼 스테이크가 아닌 초라한 하이커 푸드와 싸구려 와인이지만.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는데 다들 가스레인지를 사용하고 있어 하는 수 없이 밖에 놓여진 가스 바비큐에 마트에서 사온 스테이크를 구웠다. 다른 하이커에게 버터도 조금 빌리고. 고기가 익는 동안 와인을 플라스틱 통에 옮기자 일행들이며 다른 하이커들이 놀라 눈이 동그래진다. 하이킹에 와인을 가져간다고? 울트라 라이트 패킹을 지향하는 장거리 하이커들이라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다. Why not? 그리고는 스테이크를 마무리해서 남은 와인과 함께 먹는데 다들 관심을 보여서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자기가 먹어본 스테이크 중 최고라는 둥, 엄마가 구워준 것보다 맛있다며 뒤로 드러눕는 등 다들 액션이 과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트레일 네임을 제대로 지었다며 일행은 뿌듯해한다. 그 와중에 일행 중 한 명은 나의 직업을 듣고 놀랐다며 자신도 언젠가는 CMS를 준비하고 싶다며 내게 관심을 보인다. 이래저래 저녁 테이블이 왁자지껄하다.

4/30 월

오늘 아침은 산속의 새 소리가 아닌 마당을 돌아다니는 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헌데 닭들이 너무 나태하다. 벌써 해가 뜬 지 한참인데. 몇 시에 떠날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음식과 짐들을 다 정리하고 텐트까지 배낭에 넣어 패킹을 해 두었다. 그대로 두면 마음이 늘어져 하루 또 하루 하는 식으로 늘어지게 될 것 같아 떠날 날이 되면 무조건 짐부터 챙겨 놓는 게 스스로를 다잡는 데 도움이 된다. 새로 산 양말은 안쪽에 신는 라이너와 밖에 신는 일반 양말 두 가지인데 이 라이너가 발가락 양말이라 여간 낯설지가 않다. 하지만 여러 하이커들에게 물으니 사막의 잔모래가 양말 사이로 들어와도 발가락끼리 마찰이 없어 물집 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구입하였으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익숙해 져 봐야 할 것 같다.

어제 마트에서 산 음식들로 아침을 먹고, 일행들보다 일찍 셔틀을 타고 마을로 복귀했다. 하이커 헤븐은 마을의 메인 도로에서 1.7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메인 도로가 PCT라서 셔틀에서 내리면 바로 PCT에 복귀하는 셈이다. 왜 다른 마을들은 이렇게 PCT가 마을로 지나가게 만들지 않은 걸까? 그랬다면 히치 하이킹을 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마을에서 충전과 재공급을 하느라 훨씬 수월했을 텐데.

셔틀에서 내려 출발 준비를 하는데 먼저 와서 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챙기던 하이커가 갑자기 성질을 내며 욕을 하고 난리다. 이유를 물으니 하이커 헤븐의 냉장고에 음식을 두고 왔단다. 셔틀은 방금 떠났는데. 웃기지만 그 심정을 알기에 웃지도 못 한 채 도로를 따라 하이커 헤븐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행운을 빌어주고는 하이킹을 시작했다.

이제 하이커 헤븐만큼 유명한 또 다른 트레일 앤젤 하우스를 향해 간다. 오기 전부터 무척이나 궁금했던 Casa de Luna. ‘Casa(집) de Luna(달-月)’라니. PCT를 걷기 시작한 지 보통 한 달쯤이면 그곳에 도착한다 하여 그리 이름 지어졌다니 참 매력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이름이 아닌가 말이다. 시작 전에는 내가 얼마나 잘 걸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상태였던지라 ‘과연 내가 한 달 안에 이곳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내일이면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 생각 안에는 내가 잘 해 나가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다들 나를 스쳐 지나가는 걸음이 다른 때 보다 유독 빠르다. 의아하던 참에 지나가는 일행에게 물으니 일기예보가 좋지 않아서 다들 서둘러 까사 데 루나까지 오늘 안에 갈 계획인 것 같다. 안 그래도 하늘이 꾸물꾸물하고 바람도 차갑고 구름도 어두컴컴해서 걱정했는데 갑자기 걱정이 확~밀려온다. 일단 휴대폰이 전파 잡을 수 있게 모드를 바꿔놓고 지나가다 신호가 잡히는 곳에서 날씨 확인하니, 오늘 저녁부터 비 예보가 있다. 나도 가야 하나? 어쩌지? 수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다가 결국 들어간다는 전제하에 가지고 있던 물 1L를 버리고 달리다시피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걷는 동안 생각 해 보니 아무리 서둘러도 내 속도로는 오늘 안에 까사 데 루나에 도착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일행 중 일부는 이미 나무 사이 틈새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고, 주변의 여유 공간에는 다른 하이커들이 텐트를 치고 있다.

텐트를 치는 일행들과 인사하고 나는 더 가면서 속도랑 거리 체크 계속하고 ‘과연 내가 까사 데 루나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여기 어디에 텐트 쳐야 하는데 어디에 자리 잡고 텐트를 쳐야 하지? 아까 거기 머물 걸 그랬나?’ 길을 안내 해 주는 어플을 계속 확인하면서 가는데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마음은 조급해지고 어찌할지 결정은 못 하겠고 좋은 자리는 아무리 찾아도 안 나타나고… 일단 까사 대 루나까지 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럼 남아있는 물의 양은 3L 정도 남았으니 오늘 갈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가 놓으면 내일 물이 많이 필요 없고 저녁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 트레일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텐트 사이트 찾기 시작하는데 마땅한 데가 없어서 결국 길을 안내 해 주는 어플 포인트까지 가야지 했는데 그 포인트 바로 직전에 나무 우거지고 낮은 지대에 텐트 한 동 정도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일단 배낭 내려놓고 다른 포인트 찾아서 조금 더 가 봤으나 사진상으로 보면 바람 막아주지 못할 것처럼 보였기에 그냥 배낭 둔 곳에 텐트 치기로 마음먹고 돌아와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바람도 잘 막아 주고 까사 데루나 까지 나가는 도로까진 7km 정도니까 내일 나갈 때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니 위치까지 좋은 포인트였다. 땀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뒤 저녁거리를 만들어, 지고 온 와인과 함께 먹으며 가져온 책을 읽었다. 물론 음악도 틀어두고.

비 예보 때문에 또 마음이 흔들리고 같이 다니던 하이커들에게 휩쓸려 마음이 계속 이랬다가 저랬다가 했는데 ‘일기예보 상위 20%이면 80%는 아닌 거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비 맞으면서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두려워하나’ 싶다가도 ‘아직은 준비가 안 됐다’는 생각에 마음이 또 흔들렸다가…. 엄청 갈등했다. 내내 그렇게 마음이 부산스러운 하이킹을 한 하루였던 것 같다. 그래도 일단, 최대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 싶어서 가다 보니 괜찮은 텐트 사이트가 나타났고 덕분에 밤새 바람에 시달리지 않고 잘 수 있었다. 언제쯤 다른 하이커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뚝심 있는 나만의 하이킹을 하게 될 지. 그 때가 되면 나는 몸도 마음도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을까?

5/1 화

아침에 일어나 텐트에서 나와보니 안개가 산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클래식 틀어놓고 짐 정리하면서 갈 길이 멀지 않으니 여유를 좀 부렸다. 아침 여유가 이렇게 좋다니. 그래봤자 1시간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천천히 준비하고 걸은 탓에 어제 일찍 텐트 쳤던 일행들과 도로 부근에서 만나 함께 히치를 시도했다. 그런데 차들이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히치를 시도하는 팔을 길게 꺼내기가 무서울 정도다. 다행히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차 한 대가 섰고 일행의 설명과 함께 까사 데 루나에 도착했다. 주인 아줌마인 트레일 앤젤이 나타나 반갑게 맞아주신다. 먼저 도착했던 일행 중 몇몇이 안쪽에서 달려 나오는데 이곳의 트레이드마크인 하와이안 셔츠대신에 원피스를 입고 있다. 그는 남자 하이커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온 다른 남자 하이커도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다. 늦게 도착한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사진을 남겨두었다.

까사 데 루나 전경

하이커 헤븐에서 만난 한국인 하이커는 오늘 아침에 떠났단다. ‘네가 준 책 잘 읽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다 읽은 책은 까사 데 루나의 하이커박스에 넣어두고 창고 입구에 걸린 하이커 싸인 천에 이름을 남긴 뒤 일행과 함께 먹을 걸 사러 나왔다. 그들은 레스토랑으로 향했고 나는 주유소 스토어에서 간단한 스낵과 맥주를 사 들고 돌아왔다. 이미 배낭을 가득 채우고 있는 먹을거리를 처리해야 했다. 식사 후 피곤했는지 몸이 노곤해져 낮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진즉에 도착했어야 할 일행들이 조금 전에 도착해 다른 하이커들과 수다 중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누구는 다른 하이커들과 수다를 떨다가 누구는 한참 하이킹을 하다 보니 카메라가 작동을 하지 않아 살펴보니 배터리를 하이커 헤븐에 두고 와서… 등 이런저런 이유로 출발이 늦어졌단다.

들르는 하이커들의 사인을 남기는 대형 현수막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둥글게 모여앉아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누군가 시작한 매니큐어를 서로에게 발라주기 시작했다. 이곳의 또 다른 전통(이라고들 말한다)인데 남녀를 불문하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것이다. 처음엔 왜 굳이 그걸 칠할까 싶었는데 우리는 늘 먼지와 때에 찌들어 있고 손톱 밑엔 항상 새까맣게 때가 끼어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불쾌할 수도 있을 테니 재미 삼아 또는 그것을 감춤으로써 하이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불편을 최소화하고자 이렇게 매니큐어를 칠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매니큐어라 깔끔하게 바르기가 어려웠는지 다들 손톱에 칠한 색들이 울퉁불퉁하다. 그런 섬세한 작업이라면 한국인을 빼놓을 수 없지. 내가 나서서 자신의 손톱을 엉망으로 칠하고 있는 일행의 손톱에 깔끔하게 매니큐어를 칠해주자 그가 주변에 자랑을 한다. 다른 이들도 심지어 여자 하이커들도 내게 와서 자기도 칠해달란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매니큐어를 칠해주다 보니 저녁 준비가 되어 다들 손톱 호호 불어가며 상하지 않게 준비된 타코 샐러드를 거침없이 먹는다. 하이커이기에 가능한 스킬이다. 조심스럽게 거침없이. 그런데 아까부터 너무너무 춥다. 산에 안개는 걷히지 않고, 다운 재킷을 입었는데도 몸이 으슬으슬하다. 원래 이런가 싶어 물으니 이상기온이란다. 나중에 들으니 이날 다른 도시에는 눈까지 왔었단다. 그런데도 다들 장갑까지 낀 채 맥주를 마시면서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참 대단한 하이커들이다. 나 역시 출발 전에 꿈꿨던 ‘달의 집’에서의 이 추위에 지고 싶지 않아 같이 앉아 수다를 떤다. 시간과 추위와 맥주가 자꾸 사라지고 있다.

무료로 저녁 식사를 제공 해 준다. 도네이션은 각자 알아서

떠나기 전 기념촬영

Tags:
선경 고

여행하는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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