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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T Hiking 2018_05 – 10%의 힘

빅 베어 레이크 (428.3km)~라이트 우드(594.4km)

4/18 수
이틀 전 빅베어로 가는 길과 만나는 곳에 있던 트레일 매직이 담긴 상자 겉면에 ‘이제 당신은 10%를 해냈다’고 적혀있던 것이 계속 머리속에 멤돈다. 호스텔 안에서 글을 남길 때도 400km를 넘게 걸었다고 남기면서 많이 오긴 왔구나 싶었지만 별로 실감이 안 났다. 그런데 오늘은 트레일로 돌아와 걸으면서 벌써 430km를 넘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성취감 같은 것이 든다. 막연한 느낌은 적어지고 다음은 어디, 다음은 어디.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모하비와 테하차피를 지나 케네디 메도우에 닿겠지 생각하니, 빅베어 들어가기 전에는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오고 싶어 했던걸까라는 물음이 끊이질 않았다.

스스로 다독이며 오히려 생각을 아무것도 안 하려고 노력했었는데, 10%, 430km 이상 왔다고 생각하니 뭔가 이 길을 잘 걸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긴달까. 결국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하루하루를 지나고 나니 이렇게 놀랄만한 일이 생기는구나, 까마득하게만 보여서 현실성이 별로 없어 보였는데 이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뭔지 모를 뿌듯함도 느껴진다. 앞으로는 어떤 변화와 감정들이 생길까. 이 길의 내일이 점점 기대된다. 한국에서도 늘 한 걸음이 모여 그 높은 산에 다녀올 수 있음에 그 작은 걸음 하나에 감사하고 뿌듯해했었는데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빅베어 레이크 들어가기 전 트레일 매직 박스에 적힌 ‘10% 완료’

그건 그렇고 여기 사람들에게 나는 꽤나 어리게 보이는가 보다. 호스텔 주인 아저씨도 호스텔 내부를 안내 해 주며 나를 ‘Young lady’라고 부르더니 오늘 트레일까지 태워다 준 친구도 나를 그렇게 부른다. 동양인을 자주 보지 못하니 딱히 기준이 없어서 그런 듯하다. 하긴, 나도 트레일에서 아직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 한 명도 만나지 못했으니 드물 만도 하다.

트레일까지 태워다 준 친구. 이용요금은 $5이다

크고 오래된 나무가 많은 곳을 지날 땐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주변에 높은 산이 있으면 바람이 차다. 태양은 여전히 뜨겁고 배낭에 밴 내 땀 냄새는 여전히 지독하다. 쉬면서 뭔가를 먹으며 다음 물 공급지는 어디인지 캠프 사이트는 어디쯤 구축할지 생각한다. 트레일의 일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보같이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트레일이 어제 머물렀던 마을 맞은편 산을 지나가다 보니 마을의 뒤편을 포함한 전경을 볼 수 있었는데 너무 멋진 나머지 한눈을 팔다가 왼쪽 발목을 삐끗 한 거다. 평소에는 바닥만 보고 가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는데… 바로 산행을 멈추고 양말을 벗어 발목을 살펴봤다. 심각할 경우 마을로 다시 내려가야 할 수도 있으니. 이리저리 돌려보고 눌러도 보고 하지만 큰 통증이 없는 걸 보니 다행히도 심각한 건 아닌 듯했다. 짚고 있던 등산 스틱이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부어오를 수 있기에 가지고 있던 파스와 스포츠 테이핑으로 조치를 한 다음 잠시 쉬면서 숨을 돌렸다.

눈 쌓인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빅베어 레이크 전경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캠프 사이트를 마음에 두고 가던 중, 불에 탄 나무들이 주변에 가득한 구간을 걷게 됐다. 화재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수십 년은 자라왔을 나무들이 검게 그을려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수십 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사라진 거다. 그것도 생명이. 몇 시간째 그런 곳을 걷다 보니 이들이 왜 화재 구간의 트레일에 최소한의 안전이 확보됐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지날 수 있게 하는지 느껴졌다. 절대 나라면 이런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경각심이 생긴다.

온 산이 다 불에 탄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4/19 목
밤에 바람도 강하게 불고 너무 추웠다. 텐트 안으로 모래 먼지도 날려 들어오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신발과 슬리퍼가 온통 먼지투성이에 침낭에도 먼지가 가득 쌓여있다. 움직이기 싫어 게으름 피우고 싶어지려는 걸 털어내고 빨리 출발 준비를 한다. 움직여야 덜 춥다는 걸, 움직여서 몸에 열을 내야 추위가 가신다는 걸 아니까 일단 춥더라도 움직여야 했다. 이동 하는데도 왜 이렇게 추운건지 원… 고도가 2,006m밖에 안되는데도 이렇다니. 사막 구간 이후에 찾아올 고산지대가 걱정된다. 오늘 눈 예보가 있던데 그래서 이렇게 추운 걸까.

469.1km의 물 포인트에서 물을 정수하고 있는데 고도 1,715m에서 눈발이 날린다. 4월의 사막에 눈이라니. 한참을 바라보다 눈이 그치고 이동하기 시작해 계곡 옆길로 들어섰다. 황량한 구간을 반복하다 계곡 길을 보니 오랜만에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이 생각난다. 한국에 돌아가면 설악산도 지리산도 그리고 한라산도 꼭 빠른 시간안에 다시 가 봐야겠다. 벌써 한국의 산야가 그립다.

추위에 떨어서인지 이상하게 배가 많이 고픈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팝타르트를 한 봉지 먹고 운행하면서 클리프바-초코칩, 소시지 2개, 육포 소시지 2개, 매쉬스프 반 통이 점심때까지 먹은 음식이다. 평소보다 많은데 왜 점점 배가 고파질까?

길가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Salmon이랑 같이 다니던, 그 무릎 아픈 친구, Loob을 만났다. 어라, 먼저 트레일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하이커들이랑 Air B&B 쉐어해서 하루 자고 나랑 같은 날 출발했다고 한다. 오늘 자기는 Hot Spring(온천처럼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계곡이 있다)까지 갈 거란다. 나도 그럴까 해서 달려봤는데 이건 아니지 싶은 마음이 든다. 시간에 쫒기는 느낌일뿐더러 중간에 물을 안 받아왔고, 계곡은 저 아래에 있고… 후회할 무렵, 물도 있고 텐트 한 동 칠 만한 자리가 나타났다. 3km만 가면 핫 스프링이지만 그 한 시간 가느라 발 아프고 후회하고 가서 또 금방 해 져서 부랴부랴 정리하는 것도 싫고 해서 물가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물 걱정, 잘 곳 걱정, 거리 계산이 반복되는 사막의 하루가 무사히 끝났다.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하지만.

4/20 금
Deep creek hot springs는 PCT 구간 중 꽤 유명한 포인트이다. 물이 귀한 사막의 산맥 구간 계곡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 있는 데다 몸을 담글 수 있게 물이 고여있도록 만들어 놨다. 바로 옆엔 찬 계곡물이 흐르니 천혜의 휴양지가 따로 없다. 다만 이곳에 오려면 산길을 걸어 들어와야 한다는 것 뿐. 법적으로는 캠핑이 금지되어 있지만 PCT 하이커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텐트를 치고 냉수와 온수를 번갈아 가며 즐긴다. 나도 따뜻한 물에 발 담그고 쉬면서 여유를 좀 즐긴다.

사막 트레일 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는 천연 온천

다시 트레일을 시작해 한참을 가고 있는데 계곡 건너편에서 누군가 캠핑 장비를 메고 끌면서 내가 지나온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라, 저 길도 트레일인가? 그러고 보니 한동안 PCT 마크를 보지 못했다. 내가 제대로 PCT를 가고 있는건가? 서둘러 걸음을 멈추고 확인 해 보니 제대로 잘 가고 있다. 대체 이런저런 이름의 트레일이 몇 개나 되는지, 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무도 별로 없는 사막의 산을 한참 지나다 보니 멀리 사진으로 많이 봤던 ‘모하비 댐’이 보인다. ‘댐이라고? 이 사막에? 용도가 뭐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뜬금없는 위치에 있어 우습기까지 하다. 찾아보니 Dry dam으로 군사 시설이란다. 지하에서 외계인이라도 연구하는 걸까, 상상의 날개가 펼쳐진다.

모하비 댐. 물이 없는데 무슨 용도일까 궁금하다

오늘은 목표로 삼은 캠프 사이트가 있다. 거기까지 가 보자는 생각으로 시간에 상관없이 걸었는데 목표는 달성했지만, 평소보다 긴 36.5km나 걸어서 발 다리가 꽤나 아프다.

실버 레이크. 보기엔 좋아도 고여있는 물이라 모기가 어마어마했다

그래도 ‘picnic area’라 테이블도 있고 화장실과 물, 쓰레기통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PCT 하이커가 하나도 없네. 누가 쫓아낼 때 쫓겨나더라도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으니 일단 텐트를 치고 본다. 마이크 하우스에서 봤던 나이키 신발 아저씨랑 그제 봤던 하이커 한 명이 주섬주섬 망설이더니 내가 텐트를 다 치고 나서 물을 받으러 가자 그때서야 텐트를 치기 시작한다. 저녁으로 요리한 즉석 파스타가 입에 맞지 않아 반 이상 버렸다. 아직 배가 덜 고팠나 보다. 그리고 자기 전에 발, 다리, 팔, 허리, 그리고 온몸을 마사지했다. 오늘은 36km나 걸었으니까. 고생했어, 내 다리. 주변 호수에 살고 있는지 개구리가 엄청나게 운다. 시골에 내려 온 것 같다.

4/21 토
트레일을 걷다 처음으로 PCTA 사람들을 마주쳤다. 다들 무거운 장비를 들고 더운 날씨에도 나뭇가지에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긴팔, 긴바지를 입고 있다. 그들의 노고를 보니 이 트레일 자체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트레일 매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자원봉사자들인 거로 알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다. 어제 길가에 보이는 집들이 많은 것을 보며 그렇게 트레일 매직을 기대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나는 그저 걷고만 있을 뿐인데…

트레일을 관리 해 주는 PCTA 사람들

양말도 바뀌고 신발도 바뀌니 멈춰서 발을 돌보는 시간이 잦아졌다. 발에 이상한 느낌이 들면 바로 앉을만한 자리를 찾아서 신발, 양말을 다 벗고 발가락을 살펴보고 땀을 식힌 뒤 양말을 바꾸어 신는다. 먼저 신었던 양말은 배낭에 매달아 걸으면서 맞는 뜨거운 햇볕에 말린다. 오늘은 더운 거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날씨라 양말도 잘 마를 것 같다. 간간히 부는 바람이 더없이 고마운 하루다.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덥다’라고 느낄 날이 별로 없이 계속 바람이 부는 날들이 많았다. 사막이라고 해서 겁을 잔뜩 먹었는데 다행이다.

걷다 보니 또 스위치백의 늪에 빠져버렸다. 슬슬 짜증이 날 무렵 언덕 코너 돌아 마주한 그 도로와 기찻길은 영화 속의 잘 조직된 외계 행성의 시스템을 보는 것 같다. 지구상에 이런 풍경도 있구나 싶은 신기한 마음에 더운 것도 잊고 한참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탄산음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600m만 가면 맥도날드가 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얼음 가득한 콜라를 어찌 지나칠 수 있을까

PCT에는 길이가 긴 만큼 여러 유명 포인트가 있어서 ‘절대 놓치지 말라’는 하이커들의 추천을 받는 곳도 꽤나 많은데 오늘은 그중 하나인 맥도날드에 들르게 된다. 트레일에서 600m만 가면 맥도날드가 있다니! 사실 맥도날드는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그 옆 편의점에서 스낵이나 에너지 바 등을 공급하고 그냥 트레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앞을 지나가는 순간 맥도날드 안에 가득한 다른 하이커들을 보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어갔다. 웬걸,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깨끗한 화장실, 시원한 물도 공짜로 얻을 수 있다! 다들 큰 컵에 얼음 가득한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이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한국에서 잘 먹지도 않지만 트리플 치즈 버거 $3에 음료 리필이 $1이다. 하이커들에겐 정말 천국이다.

어제 같은 cs에 있던 하이커랑 나이키 신발 아저씨-아이스맨 뿐 아니라 웬만큼 얼굴 아는 하이커는 다 있다. Salmon, Sugar, Canon 등등. 모두 Trail name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다. Trail name은 트레일 상에서 부르는 별명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미 다른 트레일에서 이름을 얻은 친구들은 계속해서 그 이름을 사용하고, 처음 트레일을 걷는 사람들은 새 트레일 네임을 얻게 된다. 나는 동행하는 하이커들이 없어 아직 트레일 네임이 없이 ‘Sun’으로 불린다. 간혹 스스로 트레일 네임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곳 하이커들에게 나의 어떤 점이 부각될까 궁금해서 자연스럽게 생기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하이커들과 대화를 나누며 버거에 탄산음료를 두 번이나 리필해서 마셨더니 배가 터질 것 같다. 이것들을 저녁까지 누리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워진다. 결국 저녁에 먹으려고 빅맥을 하나 더 사서 배낭에 챙겨 넣고 출발한다. 그런데 나오려는 찰나 한 테이블에 한국인 아저씨 네 분이 계셔서 인사하고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신기해하시며 사진도 찍으시고 건강하라고 빌어주신다. 뭐 마실거라도 사 주신다는데 이미 먹고 마시고 배불러서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서로 건강하라고 인사 하고는 떠나왔다.

해가 져 갈 무렵 적당한 거리에 짐작해 둔 텐트 사이트에 도착해서 텐트를 쳤는데 더 멀리 간다던 Salmon 일행이 도착해 잘 자리를 물색한다. 그리고는 잠시 뒤에 다가와 자기네 쪽으로 와서 같이 어울리잔다. 이미 다 친 텐트지만 팩만 뽑은 채 그대로 들고 옮겨서 그들 일행에 합류했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내일 계획을 공유하게 됐는데 그들 역시 나처럼 마을 인근까지만 가서 캠핑하고 다음 날 일찍 마을로 들어갈 계획이라 해서 같이 어울리기로 했다. Salmon과 Sugar는 PCT와 함께 3대 트레일로 꼽히는 AT(Appalachian Trail)를 걸었던 친구들이니 따라가려면 열심히 걸어야겠다.

아름다운 노을로 마무리하는 하루

어제밤 캠프사이트에 있던 Register. 날짜와 이름을 남기는데 단순한 흔적 남기기가 아니라 만약의 경우 그 사람의 루트와 속도, 일정을 추정할 수 있다

4/22 일
예상대로 밤새 춥지 않게 잤다. 첫날, 화이트 워터 지나서 첫 홀로 캠핑, 그리고 어제, 이렇게 세 번을 빼고는 늘 추위에 떨었는데 오랜만에 잘 자서인 몸이 덜 피곤하다. 하지만 그 영향으로 겨우 7시가 조금 넘었는데 벌써 푹푹 찐다. 출발 전 워터캐쉬에서 물을 조금 더 챙기기 잘 한 것 같다. 본격 사막의 시작인 걸까.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뜨거운 태양에 드디어 정신줄을 놓기 시작했다. 음악을 들으며 춤추면서 가기 시작한 거다. 원래 산에서는 자연의 소리가 묻히니까 음악을 잘 안 듣는데 여기서는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음악을 들어도 될 것 같다. 마침 생각나는 음악을 틀었는데 생각보다 신나고 도움이 된다.

산의 옆구리를 구불구불 지나가느라 넓은 장소가 없어 많이 쉬지 못했는데 비포장도로와 만나는 곳에 커다란 나무가 보인다. 배낭을 내려놓고 양말을 벗고 쉬기 안성맞춤인 것 같아 신나게 가고 보니 어제 함께 밤을 보냈던 이들이 모두 모여 쉬고 있다. 나도 합류하여 쉬면서 간단히 요기를 하는데 트레일 매직을 바라는 건 나뿐이 아닌 듯, Salmon이 때 마침 다가오는 차를 보면서 ‘제발 시원한 맥주나 소다 있으면 좀 주고 가요’라고 속삭인다. 크게 소리치지 못하는 모습도 재미있다.

Inchworm은 내가 하고 있는 팔 토시와 다리 압박 토시를 부러워한다. 자외선 차단도 도와주지만 먼지도 막아주고 나뭇가지의 스크레치, 특히 독을 가진 식물들로부터도 안전하니까. 심지어 더운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인 점도 부럽단다. 장거리 하이킹을 하면 같은 옷을 계속 입어야 해서 때 탈 걱정에 어두운 것을 선호할 거라 생각하는데 사막에서는 열기를 덜 받아들이는 밝은색 옷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다 같이 모여 수다를 떠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혼자서는 밥 먹고 쉬어도 30분이면 충분한데 함께 있으면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오늘은 중간에 캠핑장이 있어 그곳이 목적지다. 도착하니 다들 식사 준비를 하고 있고 나는 도착하자마자 텐트를 먼저 친 뒤 옷을 갈아입는다. 사실 이 부분도 낯선 것이 대부분의 하이커는 텐트를 먼저 치고 식사 준비를 하는데 이 친구들 대부분은 식사를 먼저 하고 잘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생각의 차이가 나는 걸까. 식사를 마치고 몇몇은 텐트 안으로 가고, 몇몇은 Cowboy camping(텐트 없이 침낭만으로 밖에서 잠을 자는 것)을 한다. 이 싸늘한 날씨에도 텐트 없이 자다니, 대단한 체력들이다.

4/23 월
오늘은 마을로 들어가는 날이라 발걸음이 가볍다. 식량도 거의 다 먹어서 무게도 가볍고, 샤워와 세탁에 시원한 음료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건 많은 하이커에게 큰 에너지를 준다.

다행히 하이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이 선뜻 마을까지 태워다 주겠단다. 시간이 일러 지나가는 차량이 적어 걱정하던 Salmon과 Inchworm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감사를 연발하며 그 차를 타고 오늘의 마을 Wrightwood로 향했다. 첫번째 목표는 아침식사. 이 곳에는 트레일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아침식사로 알려진 레스토랑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내려갔던 일행들이 레스토랑 밖에 배낭을 내려두고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우리도 그 옆에 배낭을 내려놓고 들어갔다.

정해진 규칙은 아니지만 하이커들은 대부분 레스토랑 밖에 배낭을 내려놓고 들어간다

내가 선택한 메뉴는 ‘Meat lover Omelet’. 사이드로 감자와 팬케이크도 나오니 완벽한 세트라 할 수 있다. 아침을 먹고 나서는 우편물 박스를 체크하고 장비점에 앉아서 묵을 곳을 알아보기도 하고 하이커 박스를 뒤지기도 하며 식량을 구입하기도 한다. 오늘 숙소는 House라는 트레일 네임을 가진 친구가 알아본 Air B&B를 다 같이 쉐어하기로 했다. 숙소 체크인 시간이 되자 이동해서 번갈아 가며 샤워와 세탁, 휴식을 취한 뒤, 다들 저녁 식사를 위해 나간다 해서 함께 나갔다가 생각을 바꿨다. 마침 숙소 뒤편으로 어제 우리가 걸었던 산도 보이고 오랜만에 와인과 고기가 먹고 싶어 장을 봐다가 고기를 구워 숙소 베란다에 앉아 먹으며 한국 가족들과 연락도 하는 등 나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오랜만에 마을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다

4/24 화
어젯밤 다들 취해서 신나게 떠들고 놀더니 오늘 아침엔 시체마냥 늘어져 있다.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온 나는 마을 도서관에 들러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국인 하이커 한 명이 마을에 도착해 식사 중이라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서둘러 작업을 마치고 만난 그 친구는 아침에 도착해 이제 막 식사를 끝낸 터라 아직 숙소를 잡지 못했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숙소를 알아보러 가던 중 House와 다른 일행들이 있어 그 친구를 소개해주고는 같이 숙소를 쉐어해도 되겠는지 물었다. 답은 OK. 결국 하루 같이 묵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장비 체크도 하고 트레일에서 먹는 음식 이야기도 나누었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이야기하니 다른 하이커들이 신기한 듯 바라본다. 그런데 이 친구, 나보다 열흘은 늦게 시작했는데 벌써 이곳에 도착했다. 대단한 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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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 고

여행하는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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