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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베르네 프랑의 마이너 감성

“마이너(minor) 하다”라는 말이 있다. 성향이나 취향이 다수의 그것과 다를 때 우리는 “마이너 감성이 있다”고 표현한다. 이 ‘마이너 감성’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을 일컬어, 우스갯소리로 ’홍대 병(病)’에 걸렸다 놀리기도 하는데, 이는 대중문화에 있어 ‘마이너’한 감성은 홍익대학교 앞에서 인기를 끌었던 언더그라운드 밴드 음악에서 비롯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홍대병에 걸린 이들은 본인 취향에 큰 자부심을 가진 나머지, 본인이 좋아하는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음악을 다른 이도 듣는 걸 발견하면 “이건 나만 아는 노래인데, 어떻게 네가 좋아할 수가 있어?”라며 무척 분해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래를 향한 애정도는 급격히 떨어진다고 한다. 나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기는 하는데, 어쩌면 나도 홍대병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다. 대표적으로는 나의 영화 취향이 그랬는데, 10대 후반에서부터 시작해 20대 전부를 광화문과 이대에 있는 독립 영화관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나는, 문득 그 독립 영화관들이 꽤 유명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소규모 영화관에 발길을 ‘똑’ 끊어버렸다. 요컨대, 요즘은 ‘할리우드 히어로물’이 제일 재밌다. (청개구리…) 그래도 여전히 한 번씩 나의 마이너 취향을 일상에서 발견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데, 가장 최근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을 때였다. 1번 G 장조 연주를 지나, 말 그대로 마이너(minor) 단조로 연주되는 2번에 1악장 프렐류드를 듣는데, 정말이지 쿵 하는 전율이 느껴지지 않던가? 아, 역시 마이너의 뜨끈하고 끈덕하게 들러붙는 감성이란! 장조에는 없는, 단조에만 있는 이 비틀림. 그렇다. 그 정제되지 않은, 어쩐지 촌스럽고 서투르며 균형이 맞지 않는 듯한 모습이 바로 마이너의 미학이란 말이지.

30대의 나의 마이너 취향은 이제 영화가 아닌 와인으로 옮겨갔다. 남들은 잘 모르는, 남들은 잘 즐기지 않는, 남들 입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하는 와인이 내 입맛에 꼭 맞을 때 놀라운 희열을 느낀다. 오늘 말하려고 하는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은 내게 바로 그런 희열을 안겨준 녀석 중 하나다. 카베르네 프랑을 마시면서 ‘발란스’를 논하자고 하면 조금 섭섭하다. 마이너 감성을 메이저 감성의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으니까. 솔직히 말해 사람들 대부분은 카베르네 프랑을 한 모금 마시면 ‘어쩐지 발란스가 맞지 않는데?’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잘 익은 과실 풍미보다 조금은 덜 익은 듯한 푸릇한 맛이 감돌고, 타닌감이 높지는 않지만, 그 질감이 상당히 거칠고 터프해 자칫 타닌이 도드라진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베르네 프랑은 ‘카베르네’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 무색하게 무게감이 제법 가벼운데, 자칫 묵직하고 잘 익은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떠올렸다가는 기대와 달라 실망하기에 십상이다. 이런 연유로, 카베르네 프랑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를 중심으로 하는 와인 블렌드 비율에서 기껏해야 5-10%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는 ‘마이너’한 품종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카베르네 프랑을 중심으로 하는 와인은 존재한다, 그리고 상당히 매력적이다.

카베르네 프랑의 주 생산 지역은 프랑스에 있는 루아르 밸리다. 지역의 기온대 자체가 서늘한 편이어서, 레드 와인보다는 화이트 와인을 주로 생산하고, 화이트 와인이 더 유명한 지역이다. 굴 같은 비릿한 해산물과 마시면 궁합이 끝내주는 뮈스카데부터, 짭조름한 미네랄리티가 특징인 상세르, 다양한 당도와 스타일이 매력인 부브레까지. 이 쟁쟁한 화이트 와인 생산지에서 카베르네 프랑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다. 루아르 밸리 지역에서도 바닷가보다는 내륙지방에 조금 더 가까운 ‘투렌(Touraine)’ 지방이 카베르네 프랑의 주요 생산지이고, ‘쉬농(Chinon)’과 ‘부르궤이유(Bourgeil)’ 마을이 양대산맥이다. 투렌에서 더 바닷가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소뮈르(Saumur)’ 지방에 ‘소뮈르-샹피니(Saumur-Champigny)’라는 마을이 있다. 쉬농과 부르궤이유보다 진하고, 부드럽고, 과실 풍미 좋고, 그렇지만 아주 산뜻한 스타일의 카베르네 프랑을 생산한다. 좋은 카베르네 프랑 와인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카베르네 프랑 와인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생산된다. 무게감이 가볍고, 타닌도 가볍고, 산도도 높은, 마치 가메(Gamey) 품종으로 만든 보졸레(Beaujolais) 지역의 와인 같은 스타일. 새콤달콤한 과실 풍미가 중심이고, 숙성하지 않고 최대한 어릴 때 시원하게 칠링해서 마시는 것을 추천한다. 또 다른 하나는 한 5-10년 병 숙성해서 마실 수 있는 스타일인데, 무게감은 미디엄 정도에, 높은 타닌을 가졌으며, 오크통 숙성을 한 와인이다. 전자와 비교했을 때 오크 숙성과 병 숙성에서 비롯한 2, 3차 풍미를 복합적으로 즐길 수 있다. 둘 중 어떤 스타일이든 간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카베르네 프랑의 특징은 이 품종의 생장 환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카베르네 프랑은 레드 와인 품종치고 제법 서늘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꽃이 빨리 피고, 열매가 빨리 익는데, 이 때문에 포도가 천천히 익는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품종에 비해 당도가 낮거나 조금은 덜 익은 듯한 푸릇한 뉘앙스가 있다. 또한, 타닌도 잘 익은 타닌이 아니다 보니 비록 타닌 자체의 양은 많지 않더라도, 그 질감이 거칠고 터프하다. 또한 카베르네 프랑은 특유의 ‘향기로움’을 품고 있는데, 이 향기로움은 상당히 우아해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블랜드에 소량 사용될 경우 색다르고 매력적인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그렇다. 이미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카베르네 프랑 와인의 약간 덜 익은 듯한 느낌, 거칠고 터프한 듯한 타닌의 질감과 푸릇한 과실의 풍미가 바로 카베르네 프랑 와인의 매력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거기에 특유의 우아하고 멋들어진 향기가 함께하면, 어쩐지 촌스럽고 미숙해 보이지만, 그 어색함이 바로 매력이고 사랑스러운 와인이 완성된다고 주장하려는 참이었다. 오크 숙성 후 5-10년 병 숙성한 카베르네 프랑에서는 또한 상당히 특이한 2,3차 풍미가 나는데, 혹자는 ‘너무 빨리 늙어버렸어’라고 평할지 모른다. 그러나 잘 익은 카베르네 프랑으로 만든 와인은 과실의 농도와 산도, 타닌, 이 세 박자에서 제법 높은 점수를 받기 때문에 분명 숙성할 힘이 있는 녀석이다. 그렇게 숙성이 된 후에 느껴지는 연필심 같은 아주 흥미롭고 복합적인 향은 카베르네 프랑의 매력을 한층 더 높여준다. 마치 아주 오래된 보르도 와인에서 느껴지는 복합미 같다고 할까.

미국 캘리포나이 나파벨리에 위치한 ‘페주(Peju)’ 와이너리가 선보인 ‘카베르네 프랑 리저브’ 와인을 시음하며

카베르네 프랑 와인 스타일은, 점차 포도 농사 기술과 양조 기술이 발전하면서 덜 익은 듯한 뉘앙스와 거친 타닌을 보완한 부드럽고 깊고 완숙한 스타일의 세련된 와인의 모습으로 대체되고 있다.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와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루아르 밸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세계 국가에서 카베르네 프랑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하고 있다. 지난봄에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방문했을 때, 한 작은 와이너리에서 무척 세련된 카베르네 프랑 와인을 마주쳤던 기억이 있다. “아, 카베르네 프랑으로도 이처럼 완숙하고 부드러운 와인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정말 맛있게 마셨고, 그 와인은 지금 나의 셀러에 고히 모셔져 있다. 프랑스 루아르 밸리에서도 이처럼 상당히 잘 만들어진 현대 스타일의 카베르네 프랑은 전문가들에게 좋은 성적을 얻으며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카베르네 프랑 품종 자체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무척 우아하고 고고한 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마이너가 메이저로 진출하는 순간이랄까.

‘홍대병’을 가진 개인의 입장에서는, 카베르네 프랑이 여전히 ‘마이너’의 영역에 있어 줬으면 하는 엉뚱한 바람 또한 있다. 더욱 깊어지고 완숙한 모습의 카베르네 프랑도 좋지만, 어쩐지 거칠고 조금은 풋내나는 모습의 카베르네 프랑이 내겐 더 친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 이런 바람은 마음속에만 담아두기로 한다. 나의 플레이리스트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오혁 밴드가 무한도전에 나왔을 때처럼.. (응원합니다…)

“바보같다 생각했어, 너를 한 번 봤을 땐. 멍청한 눈, 헝클어진 머리, 마른 몸. 착하다고 생각했어, 너를 두 번 봤을 땐. 상냥한 눈, 귀여운 머리, 날씬한 몸. 사람들은 너를 몰라, 안경 너머 진실을 봐. 어리숙한 모습 뒤에, 천사같은 네 영혼을. 나밖에는 아무도 모를거야. 바보 같다 생각했어, 너를 한 번 봤을 땐. 어눌한 말, 촌스러운 표정, 어색했지. 착하다고 생각했어, 너를 두 번 봤을 땐. 솔직한 말, 신선한 표정, 좋았지. 사람들은 너를 몰라, 안경 너머 진실을 봐. 웃고있는 얼굴 뒤에 기댈 곳 없는, 내 어깨를. 너 밖에는 아무도 모를거야. – 자우림 1집. 애인발견!!!”

세상에는 어떤 기준이 있다. 와인을 평가하는데도 분명 기준이란 것이 있다. 한참 디플로마 공부를 할 때, 일견 ‘객관적인 평가’와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상충해 힘들 때가 있었다. 충분히 매력적인 와인인데,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를 하다 보면 점수가 박하게 나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와인은 전혀 개의치 않을지 모르나 그런 평가를 해버리는 내 마음이 어찌나 불편하던지. 와인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아니,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은 다만 객관적인 잣대나 가격 대비 퍼포먼스를 의미하는 가성비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저 그 자체만으로 개성 있고 매력 있어 좋아할 수도 있을 뿐이다. 왜인지 마음에 끌리고 입맛에 맞아서 그저 좋은 와인이 있기 마련이니까. 요컨대 카베르네 프랑은 내게 있어 그런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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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ica S Lee

WSET Diploma candidate, 香港거주. 바다와 와인을 사랑하는 프리랜서 기고가. La 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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