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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의 와인을 만나는 일에 관하여

100%의 와인을 만나는 일에 관하여

양정아 2019년 7월 16일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뒷길에서 나는 100%의 여자와 스쳐 지나간다. 

그다지 예쁜 여자는 아니다.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 뒤쪽에는 나쁜 잠버릇이 달라붙었고, 나이도 모르긴 몰라도 이미 서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50m 앞에서부터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의 여자인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내 가슴은 불규칙하게 떨리고, 입안은 사막처럼 바싹바싹 타들어 간다.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의 여자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

100% 하나의 품종으로 완벽한 와인을 만나기란 와인의 양조 과정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쉽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흔히 ‘100% 하나의 품종으로 만드는 와인’하면 피노 누아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까다롭고 섬세하며 여리여리한 피노 누아를 어르고 달래서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는 오랜 세월 익혀온 노하우가 불가피하다.

이렇듯 와인 한 병 속에 담긴 마법을 만들어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나에게 꼭 맞는 100% 와인을 만나는 일이다. 와인을 잘 몰랐던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와인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 와인이 부르고뉴(Bourgogne) 탑 생산자의 그 대단한 리쉬브루(Richebourg)여서도, 보르도(Bordeaux)의 황금 빈티지여서도 아니었던 것 같다.

“와인을 좋아해요.”라고 하면 대부분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오, 고급스럽네요. 난 술이라곤 소주만 먹는데”이다. 때에 따라선 “정말이요? 저도 와인 너무 좋아요!”도 있지만. 프랑스가 아닌 한국에서는 ‘와인을 마신다’ 하면 따뜻한 느낌의 조명 아래 베이스 소리가 둥둥거리는 재즈가 흘러나오는 곳에서 잘 차려입은 남녀가 잔을 부딪치는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그렇듯 그때의 나에게 ‘분위기 있는 술=와인’ 은 평범했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고, 사랑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와인이 맛있어서, 건강에 좋아서, 분위기를 내려고 등 각기 다른 이유로 와인을 마시지만 나에게 꼭 맞는 ‘100% 와인을 만나는 일’ 은 나에게 꼭 맞는 100% 짝을 만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100%의 누군가를 기다려본다 / 사진 제공: 양정아

어느 곳에 살았던 소녀와 소년이 서로가 100% 상대임을 알아챘지만, 만약 정말로 서로에게 100%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것이라 믿고 헤어진다. 그 후 어느 해 겨울, 소녀와 소년은 당시 유행한 악성 인플루엔자에 걸려 옛날 기억들을 깡그리 잃고, 14년 후 다시 마주치지만, 그들의 기억은 너무나 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 전만큼이나 맑지 않았기에 그대로 사람들 틈 사이로 사라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해맑은 날에 100%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에 관하여>의 이야기이다.

몇 년 전으로 돌아가, ‘와인=분위기 있는 술’ 이었을 때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난 나에게 꼭 맞는 100% 와인을 만났다. 흔히 보이는 와인도 아니다, 라벨이 멋진 것도 아니다. 정 중앙에는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글씨가 적혀있고, 가격도 모르긴 몰라도 3만 원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0m 앞에서부터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 와인은 내게 있어서 ‘100%’의 와인인 것이다. 주황색 라벨에 La 50/50이라고 적힌 와인은 내 눈길을 끌었고 와인을 마시며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던 생산자를 찾아보게 되었다.

부르고뉴 본 로마네 (Vosne-Romanee)지역의 빛나는 와인 생산자 안느 그로(Anne gros)가 남편 장 폴 톨로(Jean Paul Tollot)와 함께 랑그독에 위치한 미네르부아(Minervois)지역에서 만든 La 50/50. 안느 그로와 그의 남편이 각각 반 반의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와인 한 병은 와인을 ‘와인=분위기 있는 술’에서 ‘와인=인생’으로 바뀌게 한 계기가 되었고 그 후 와인을 마실 때마다 와인 한 병에 담긴 인생을 찾아 빠져들게 되었다.

안느 그로와 장 폴 톨로의 만남 / 사진 제공: 양정아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빛은 너무 연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 전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말없이 엇갈려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의 여자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

 

지금 La 50/50을 아무런 정보 없이 보게 된다면 어떨까? 우선 와인을 집어 들기 전에 이 와인이 프랑스 와인인지 미국 와인인지 확인하고, 품종을 보고 빈티지와 생산자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게 맑지 않은 영혼으로 신성한 와인을 탐색하다가 비슷한 가격대의 다른 와인들 중 La 50/50이 우월함을 차지했을 때 집에 들고 와 온도를 맞춰놓고 와인서처(Wine-Searcher)나 비비노(Vivino)를 찾아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00% 와인을 만나는 일이란, 하루키의 소설에서처럼, 나에게 100% 상대를 알아보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와인이 나에게 주는 첫 느낌만으로 퐁당 빠지기엔 이미 54%. 76% 정도의 와인들을 많이 만나봤던 터이고, 그로 인해 쌓인 데이터가 주는 평균 결과값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입해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10년 전에는 이 와인이 미국 와인이든 프랑스 와인이든,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와인인지 안느 그로의 샹볼 뮈지니(Chambolle-Musigny)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와인을 만나는 매 순간이 설렘 그 자체였는데 이제는 쓱 보고 내가 좋아하는 지역이나 품종이 아니면 별로 손이 가지 않고 흥이 나지 않는다.

와인이든 사람이든, 찾아온다 믿는다 / 사진 제공: 양정아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빛은 너무 강하고 와인에 대한 태도는 이제 10년 전 만큼 맑지 않다. 하지만, 8월의 어느 더운 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시원한 무언가를 찾아 편의점에 들어가듯 와인샵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와인들 중 첫 번째 느낌에만 의존해 와인을 골라보는 건 어떨까? 라벨이어도 좋고, 와인의 모양이어도 좋다. 혹시 모른다. 나에게 100% 꼭 맞는 와인을 만나게 될지도.

양정아

빠리의 로맨스를 꿈꾸고 뉴욕의 화려함을 동경하는 현실적 낭만주의자 #퐁당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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