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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보다 둘이 누렸으면 하는 코펜하겐의 하루

하나보다 둘이 누렸으면 하는 코펜하겐의 하루

신동호 2017년 5월 23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동쪽의 해안을 따라 여행하면 그 또한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해안선을 따라 훔레베크에서 멈추면, 현대 미술의 정점을 만날 수 있다. 미술과 해안은 낭만의 앙상블처럼 태어난 단어 같다. 아침부터 부산하다. 시내 여행은 오후로 미루고, 가장 먼 목적지인 루이지애나 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을 가려고 준비 중이다.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헬싱괴르(Helsingør)행 보통열차를 탔다. 약 30분 후, 훔레베크(Humlebaek) 역에서 내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루이지애나 미술관이 적힌 이정표를 따라(사실 홈레베크로 온 여행객들은 이 미술관이 목적인 게 태반이기에 이들을 따라가는 게 진리) 도보로 15분 정도 가다 보면 초록으로 물든 미술관이 보인다. 이 미술관은 1950년 이후 등장한 현대미술품을 전시하는 곳으로 그 수준이 최상급이라는 평가다. 미술관 내부, 이를 감싸고 있는 드넓은 정원과 정원 속 한 점 한 점을 찍는 조각품들, 그리고 탁 트인 올레슨 해협의 전망은 부록치고는 꽤 비중이 높다. 이 건물은 단순히 ‘미술품들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미술관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건축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자연 일부분이다. 미술품이 실내와 실외 곳곳에 설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미술관 통째로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하나의 예술품으로 얹어져 있다. 건축물이 자연과 아름다운 풍경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건축가의 철학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미술관이란 호칭이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걸 보여준다. 유리로 만든 회랑 형식의 독특한 건물 구조 때문에 건축가들도 주목하는 곳이다. 알고 보니 30여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사려 깊고 신중하게 지어진 공간이라고 한다.

덩굴로 둘러싸인 루이지애나 미술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동양인 한 분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존 레넌의 배우자이자, 일본 전위예술가 요코 오노(Yoko Ono)의 전시회. 개인적으로 그녀를 꼼꼼히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덴마크 시내 독립영화관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 다음으로 반가운 인물이다. 관람 후 정원에 나왔더니 독특한 나무가 서 있었다. 메모가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열매 대신 열려 있는 건 방문객들의 메시지다. 일명 ‘방명록 나무’에 낯선 한글도 적어 걸었다. 평소 미술관 투어를 좋아하는데, 이 미술관은 기억에 남을 만한 곳 중 하나로 등극했다. 혼자 누리기에는 답답한 부분이 많았다. 공감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와 다시 방문하고 싶다. 미술관에 딸린 카페. 카페의 한쪽 면은 바다의 전경으로 깔아놓아 심신의 여유를 찾는데 제격이다. 하루 내내 내 시간을 내어 주어도 사치가 아닌 곳, 루이지애나 미술관이다.

야외에 마련된 ‘방명록 나무’

미술관 옆 해안가

다시 코펜하겐 시내로 들어왔다. 오피스룩을 차려입고 자전거를 타는 덴마크 여성들에 시선을 몰아줬다. 혼자 여행하면서 비워진 옆자리를 눈으로 채울 때가 있다. 덴마크 여성은 꽤 매력적이다. 부인할 수 없고, 부정하기도 싫다. 누가 물었다. 유럽 국가 중에 어느 나라 여성이 마음에 드냐고. 난 망설임 없이 덴마크 여성이라고 답했다. 큰 꾸밈이 없어도 몸매 자체가 패션인 덴마크 여성. 한동안 시내에서 그들을 관찰했다. 바이킹 민족의 피는 무시 못 한다. 그들의 과거는 어떠했을까.

코펜하겐 시내에서의 덴마크 여성

북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인 코펜하겐 시립박물관(Københavns Bymuseum)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가 약 800년 동안 겪어온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대별 코펜하겐의 지도와 다양한 도면, 주택, 가구, 의복, 생활용품 등 코펜하겐의 역사와 시민들의 삶을 증언할 다양한 자료들을 소장, 전시한다. 박물관 정문 앞에는 중세시대 코펜하겐 전체의 모습을 형상화해 놓은 모델이 전시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코펜하겐 역사적 건축물들의 과거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모델들이 있다. 또한,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으며 코펜하겐의 시민이었던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전시관이 있어 그의 삶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훑어볼 수 있다. 이 박물관은 소장품의 전시뿐만 아니라 코펜하겐 시내 곳곳의 유물 발굴 현장에 박물관 소속의 고고학자들을 파견해 고고학적 연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때론 남의 나라 역사라서 흥미를 잃을 수 있지만, 이 역사적 기반으로 지금의 문화와 예술, 먹거리 등도 진화한 것이기에 사명감으로 둘러보면 좋은 박물관이다.

박물관 앞. 중세시대의 코펜하겐을 보여주는 모형물

시내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놀이기구가 있다. 우리나라 자이로 드롭과 같은 이 놀이기구는 시내 한복판 어디에서 하늘을 바라봐도 구름에 걸려 멍하니 쳐다보게 한다. 그 놀이기구를 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티켓을 끊고 들어가는데, 주변에 경호가 강화되었다. 무슨 일일까. 사람들의 표정으로 봐서는 대형 사고와 같은 비보는 아닌 듯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다. 마치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 무리에 섞였다. 이윽고 누군가가 호위무사를 받으며 등장한다. 그 아우라로 짐작하건대, 덴마크 왕실의 가족인 듯하다.

덴마크 왕실 가족이 티볼리 공원에 들어서고 있다.

티볼리 공원은 규모가-롯데월드와 서울랜드에 비교해서-생각보다 크진 않지만, 코펜하겐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밀도 집약적 도시형 놀이공원이다. 1843년에 문을 연 티볼리 공원은 그 역사만큼이나 시민들에게 애정이 깊은 곳이다. 디즈니의 창시자인 월트 디즈니는 부인과 함께 코펜하겐을 여행하던 중에 티볼리 공원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공원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게오르크 카르스텐센 Georg Carstensen이 당시 국왕 크리스티안 8세에게 건의하여 왕가의 정원을 개조하였다. 공원의 모델이 이탈리아 티볼리 시에 있는 에스테가(家)의 정원이어서 티볼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편 왕가의 공원을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도록 허가한 데는 주변 국가와의 분쟁으로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던 당시 코펜하겐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공원의 운영 주체를 모든 시민이 주주로 참여하는 주식회사로 하고, 입장료는 공원을 환경친화적으로 조성하는 데 사용하였다. 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이 이 공원을 사랑했는데, 특히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자주 이곳을 찾아 새로운 동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사진을 찍을만한 장소가 구석구석 자리해 있다. 난 그런 연인들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며 객관적인 관점에서 공원을 돌아봤다.

덴마크 시민들의 쉼터, 티볼리 공원

공원 안에는 각종 놀이 시설 외에도 팬터마임 극장, 티볼리 콘서트홀 등의 엔터테인먼트 시설과 40여 개의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특히, 핼러윈 시즌이나 연말에 이곳은 성황을 이룬다. 여름밤에는 이곳에서 수려한 불꽃놀이 광경도 볼 수 있다. 신기한 건 다른 한쪽에는 위치한 차이나 타워다. 1900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한자와 중국문화가 이 공원 안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또 티볼리에는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롤러코스터가 있다. 1914년에 만들어져 아직 운전 중인 목제 롤러코스터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주로 아침부터 낮 동안은 중년 이상, 낮부터 저녁 무렵까지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 밤에는 젊은이들이 이용한다.

레고의 나라답게 공원 자체도 레고스럽다.

유명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었는데, 혼자 타면 뭐하나. 혼술, 혼밥, 혼영화 다 익숙한데, 혼놀이기구는 아직 낯설다. 옆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심장 떨어지는 기분을 같이 만끽해야지 롤러코스터 아닌가. 그래 여기도 같이 와야 했었어.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이제 하나 남았다. 술. 티볼리 공원의 선견지명인가. 공원에서 나오면 바로 레스토랑 겸 브루 펍이 보인다.

브리게리에트 아폴로(Bryggeriet Appolo) 레스토랑이자 소규모 맥주 양조장

브리게리에트 아폴로(Bryggeriet Appolo). 덴마크 하면 칼스버그 맥주라 하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은 역사적 스펙을 지니고 있다. 자체 소규모 맥주 양조장을 가진 곳 중에 가장 오래됐다. 역사가 약 100년이 흘렀고, 이제는 단순히 레스토랑보다는 문화재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사실 혼자 가는 펍은 작고 어두운 곳이 제격인데, 이곳은 그 요소와 대비된다. 넓은 공간에 사방이 유리 벽으로 되어 있어서 낮에는 훤한 환경에서 맥주를 마셔야 했다. 대부분 가족과 지인 단위로 자리하고 있는데, 혼자 들어와 약간 주눅이 들었지만, 얼른 바로 이동해 맥주를 골랐다. 메뉴판에 가장 큰 폰트로 적힌 2가지 맥주(아폴로 필스터, 스페셜 비터)를 주문하고 빈 테이블을 선점했다. 잠시 앉아 있다가 주문이 밀려 있는 걸 눈치채곤 양조시설이 있는 곳을 둘러봤다. 소규모 맥주 양조장이라고는 하지만, 지하와 1층을 넘나들며 설계된 양조시설에 놀라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레스토랑 한가운데를 마치 랜드마크인 양 볼 수 있게 개방해놔서 술꾼들은 테이블이 아닌 잔을 들고 관람하며 마시게 한다. 나에게는 이곳이 미술관이고 박물관이고 놀이공원이다.

레스토랑 한복판에 설치한 양조시설

지하에 있는 발효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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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발로 기억하는 보헤미안, 혀로 즐기는 마포술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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