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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와인 마을 9탄 – 발레리쉐

한 번 들어본 일도 없는 발레리쉐 Valeriche라는 마을을 가게 된 건 이 마을 근처에 있는 두 곳의 와인 생산자 때문이었다. 그라브너 Gravner라디콘 Radikon. 일명 ‘오렌지 와인’을 만드는 세계적인 명성의 생산자다.

오렌지 색을 띠는 와인 / 사진 제공: 배두환

우리 부부도 ‘오렌지 와인’이라는 단어는 오랜 시간 동안 들어왔고 호기심이 있었지만, 한국에서 접할 기회는 없었다. 값이 비싸다는 이유, 그리고 그 값을 지불하고 내가 과연 그 맛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까가 의문이었다.

여하튼 우리의 ‘오렌지 와인’에 대한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이탈리아 와인 여행을 기획하고 있을 때 반드시 들러보고 싶은 1순위에 그라브너와 라디콘을 넣었다. 운 좋게 두 와이너리에서 모두 긍정의 답변이 돌아왔고, 우리는 발레리쉐에 머물며 두 곳의 와인 명가를 심도 있게 경험할 수 있었다.

‘오렌지 와인’이라 함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내추럴 와인’의 일종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 우리 부부는 ‘내추럴 와인’이라는 용어를 100% 신뢰하지는 않는다. 유기농 Organic 와인이나, 바이오다이나믹 Biodynamic 와인 같은 카테고리는 이 와인들이 그에 합당한 룰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인증하는 회사들이 있고 소비자가 원하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내추럴 와인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내추럴 와인 생산자가 자기 와인이 첨가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순수 포도로만 만들어진 와인이라고 한다 한들 그와 함께 1년 동안 와인을 만들어보지 않은 이상 그 말을 100% 신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오렌지 와인의 경우 (100%라고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생산자들이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나믹을 지향하고 있다. 그라브너와 라디콘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은 워낙 취향이 확고해서 인증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다. 신뢰가 곧 그들의 브랜드 파워인 셈이다.

‘오렌지 와인’이라는 별칭이 생긴 것은 와인의 색 때문이다. 오렌지 와인은 화이트 품종만을 사용한다. 하지만 파쇄 후, 레드 와인처럼 껍질과 함께 오랜 시간 침용 maceration을 거치기 때문에 그로부터 우러나온 색소, 폴리페놀 성분으로 와인의 색이 짙어지고 결국 오렌지 빛을 띠게 된다. 사실 엄격히 이야기하면 호박빛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앰버 와인이라는 용어가 세계적으로 더 널리 쓰이고 있는 듯하다.

침용의 기간과 방법도 생산자의 철학에 따라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그라브너의 경우 저장 용기로는 땅속에 묻은 크베브리 Qvevri를 쓴다. 종종 편의상 암포라 Amphorae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엄격히 크베브리가 맞는 용어이다. 크베브리의 뜻 자체가 ‘that which is buried’(땅 속에 묻힌 것)으로, 레몬 모양의 큰 테라코타 용기를 가리키는 조지아어다. 크베브리는 이를 만드는 장인이 따로 존재하며 2014년에 UNESCO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크베르리의 뾰족한 부분이 아래를 향하도록 땅에 묻는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땅 속에 묻힌 크베브리. 정기적으로 휘저어주기만 한다. / 사진 제공: 배두환

그라브너는 이 크베브리에서 약 6개월간 길게 침용을 한다. 야생 효모에 의해 자연 발효하고 어떤 첨가물도 첨가하지 않으며, 당연하지만 온도 조절도 하지 않는다. 와인메이커가 하는 것은 하루에 몇 번씩 독특하게 생긴 긴 나무 막대로 아래위를 골고루 섞어주는 것뿐이다.

포도 껍질을 눌러주는 긴 막대기 / 사진 제공: 배두환

마침내 위에 둥둥 떠 있던 부유물들이 가라앉게 되면 와인을 걸러 내고 다시 6개월을 크베브리에서 보관한다. 즉 땅으로부터 탄생한 포도가 땅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이 1년의 과정에서 마치 산화된 듯한 독특한 풍미가 생기게 된다. 참고로 그라브너는 6년을 대형 오크 배트에서 추가 숙성을 거치기 때문에, 포도를 수확한 후 무려 7년이 지나야 세상으로 나와 빛을 보게 되는 셈이다. 지극 정성이 아닐 수 없다.

6년간 추가 숙성시키는 대형 오크통 / 사진 제공: 배두환

비단 그라브너 뿐만 아니라, 라디콘이라든지, 다리오 프린칙 Dario Princic, 에디 칸테 Edi Kante, 코스 Cos 같은 유명 오렌지 와인 생산자들은 최소한의 간섭으로 오랜 시간 인내하며 정성스럽게 와인을 만들고 있다.

우리가 그라브너와 라디콘에서 그들의 와인을 맛보고 느낀 것은 마치 ‘명인이 만든 숙성 김치’와 같은 고결함이었다. 향과 맛에서 새콤한 듯한 뉘앙스가 특징인데, 만약 ‘와인이란 이래야 한다’는 확고한 기준을 가진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오랜 시간 와인을 마셔왔기 때문에 새로운 와인에 갈증이 있는 와인 애호가나, 독특한 와인의 풍미를 특히 즐기는 소비자라면 취향 저격일 것이다.

‘숙성’이라는 바다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었던 그라브너 / 사진 제공: 배두환

다시 마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발레리쉐는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 Friuli-Venezia Giulia 주의 고리치아 Gorizia 현에 위치해 있다. 구글 맵을 켜고 ‘Valeriche’를 입력하면 알 수 있지만, 동쪽 끝 슬로베니아 국경에 지척으로 맞닿아 있어 두 나라의 문화와 언어가 혼재해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을 전체가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슬로베니아나 크로아티아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오렌지색 지붕이 특징적인 집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평화로운 마을이다

올리브 나무와 포도 나무 치마를 두른 발레리쉐 마을 / 사진 제공: 배두환

우리 부부는 숙소에서 바라보는 환상적인 느낌의 포도밭 전경도 좋아했지만, 마을을 거닐다가 만난 리스토란테 보그릭 Ristorante Vogric에서의 저녁 식사도 잊을 수 없다. 이탈리아 북부답게 단단한 질감의 폴렌타를 맛볼 수 있고, 슈니첼 같은 동유럽 음식도 굉장히 훌륭했다. 물론 레스토랑의 기본 정신은 이탈리아 요리라 생각된다. 저렴한 가격, 따뜻한 분위기 속에 가정식을 먹는 기분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보그릭 레스토랑 외부 전경 / 사진 제공: 배두환

아늑한 분위기의 내부 인테리어와 맛스럽게 튀겨진 슈니첼 / 사진 제공: 배두환

우리 부부는 이 마을에서 머물면서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 주의 여러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마리오 스키오페토 Mario Schiopetto, 스투룸 Sturm, 라디콘, 그라브너, 보도피벡 Vodopivec, 론코 델 젤소 Ronco del Gelso. 특징이라면 대부분의 와이너리들이 일반 관광객들을 위한 테이스팅 룸이 따로 없다는 점이다. 어떤 곳이든 방문하고 싶다면 반드시 사전 예약을 해야만 한다.

만약 오렌지 와인에 특히 관심이 있다면 우리 부부가 머물렀던 마을이나 혹은 근처에서 숙박을 잡기를 추천한다. 그라브너, 라디콘, 다리오 프린칙 등 오렌지 와인의 대가들이 서로 차로 10분 이내에 아주 가깝게 있다.

개인적으로는 라디콘을 가장 추천한다. 이곳의 현 오너는 사샤 라디콘 Sasha Radikon인데, 그의 아버지 스탄코 Stanko는 요스코 그라브너(그라브너의 현 오너)와 함께 이 지역의 토착 품종인 리볼라 지알라 Ribolla Gialla로 고대 양조 테크닉, 즉 오렌지 와인을 되살린 장본인으로 꼽힌다. 리볼라 지알라는 본래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이곳에서 재배되어 온 오랜 역사를 가진 품종으로, 두꺼운 껍질 덕분에 오렌지 와인의 원료로 이 지역 즉 콜리오 Collio에서 굉장히 주목 받고 있는 포도 품종이다. 라디콘에서 맛본 리볼라 지올라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라브너보다 뛰어난 균형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홈페이지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특별히 방문객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도 운영하고 있다.

리보라 지알라를 포함한 테이스팅 와인 라인업 / 사진 제공: 배두환

이탈리아 북부 국경을 따라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혼합된 마을 정취를 느끼며, 오렌지 와인 그리고 지역의 훌륭한 화이트 와인들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발레리쉐 Valeriche 마을은 분명 매력적인 여행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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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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