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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와인 마을 4탄 _ 바르바레스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 있다. 우리 부부가 처음 바르바레스코 Barbaresco 마을을 들렀던 그때처럼. 가을의 끝, 바르바레스코는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추워진 공기를 따라 마을 전체가 몽환적인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마을 안 와이너리의 테라스에서는 안개를 안주 삼아 와인을 홀짝이던 이들이 가득했다. 몽환적인 풍경, 테라스에서 우리가 마신 와인, 그 시간은 우리의 기억 속에 단단히 박제되어 아름답게 남아 있다.

안개에 뒤덮인 바르바레스코를 보며 와인을 즐긴다 / 사진 제공: 엄정선

이탈리아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와인 마을들이 있지만, 우리 마음속의 영원한 1등은 바르바레스코다. 가야 Gaja라는 불세출의 명장이 이 마을에 있다는 점이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크게 다가올 테지만, 현지 음식을 정갈하게 담아내는 매력적인 레스토랑과 다양한 시음실은 이미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 만하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수많은 바르바레스코 와인을 테이스팅할 수 있다 / 사진 제공: 엄정선

바르바레스코 마을은 이탈리아 북서부의 피에몬테 Piedmont 주에 있다. 토스카나, 베네토와 더불어 이탈리아 퀄리티 와인을 책임지는 중요한 와인 산지다. 흥미로운 점은 피에몬테가 11세기부터 사보이(혹은 사부아, 사보이아)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이다. 사보이 왕조는 프랑스의 사보이 지역을 중심으로, 1032년 사보이 백작으로 서임된 움베르토 1세에 의해 성립됐다. 이후 혈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왕조가 됐다. 사보이 왕조의 헤드쿼터였던 토리노는 현재 피에몬테의 주도이며, ‘이탈리아의 파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 때문에 피에몬테를 여행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프랑스적 감성을 많이 느낄 수 있다.

와인에서도 물론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으로 꼽히는 주세페 가리발디 Giuseppe Garibaldi, 카밀로 벤소 Camillo Benso는 혁명가이자 정치가였지만, 포도밭을 소유한 지주이기도 했다. 가리발디 장군은 피에몬테의 포도밭이 노균병에 고통받을 때 프랑스에서 개발한 보르도액(Bordeaux Mixture)을 소개한 인물이다. 벤소 또한 적극적으로 프랑스의 선진화된 포도 재배와 양조기술을 소개했다. 이밖에 지금의 피에몬테의 주요 와인들이 단일 품종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프랑스 부르고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에몬테는 왼쪽에 그림 같은 알프스산맥을, 남쪽으로는 웅장한 아펜니노산맥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Piedmont’의 의미인 ‘foot of the mountain’도 이 같은 자연환경에서 비롯됐다. 이 산맥들 때문에 피에몬테의 내륙, 특히 와인 산지가 몰려 있는 남부는 가을이 되면 종종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는 독특한 환경을 보인다.

이 같은 기후 때문에 피에몬테의 포도밭들은 구릉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구릉들은 대개 산맥과 가까워질수록 많아지기 때문에 포도밭은 거의 피에몬테 남부에 몰려 있다. 해발고도가 높은 포도밭들은 안개에 가려지는 햇빛을 더욱더 많이 받을 수 있어 포도재배에 이상적이다. 때문에 바르바레스코의 유명 포도밭들도 기슭을 따라 가파른 경사면에 위치한 것이 특징이다. 포도 품종은 오로지 네비올로다. 참고로 ‘Nebbiolo’의 어원인 ‘Nebbia’는 ‘안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네비올로 껍질에 생기는 흰 분에서 유래하기도 했고, 만생종인 네비올로가 수확되는 늦가을에 스멀스멀 내려앉는 안개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구릉에 위치한 바르바레스코의 포도밭은 안개의 영향을 덜 받는다 / 사진 제공: 엄정선

네비올로는 섬세한 품종이다.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처럼 기후와 토양에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에 전문가의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다. 또한 품종 자체가 지니고 있는 타닌이 많기 때문에 장기 숙성에 적합한 와인을 만들어낸다. 많은 와인 애호가들은 수년, 혹은 수십 년 숙성되어 은은한 주황빛을 띠는 최상급 바르바레스코 한 잔을 음미하기를 고대한다.

우리 부부는 바르바레스코 마을을 세 번 방문했다. 워낙 애정을 가지고 거닐었던 곳이라 마을 구석구석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마을 중심에는 바르바레스코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이자, 에노테카가 있는데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렀다. 수십 종에 이르는 바르바레스코 와인들이 진열되어 있고, 대개 한잔에 2유로에서 3유로 사이에 와인을 테이스팅할 수 있다. 마을 안에는 가야를 비롯한 지역을 대표하는 와이너리들도 다수 포진하고 있다. 아쉽게도 가야는 반드시 예약해야 하고 전문인들의 입장만이 허락된다. 하지만 마을 곳곳에 오픈 마인드의 와이너리와 시음실이 있어 와인 여행자들은 발길이 닿는 대로 들어가 와인을 맛볼 수 있다.

이 좋은 와인들을 2~3유로에 테이스팅 할 수 있다 / 사진 제공: 엄정선

와인도 와인이지만, 마을 중심에 위치한 레스토랑 <Trattoria Antica Torre>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레스토랑을 처음 들렀던 날, 오후에 가야 와이너리 투어가 예약되어 있었다. 아늑한 테이블에 앉아 소박한 가정식과 가야의 와인을 매칭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에게 메인 요리가 서빙될 무렵 우리의 맞은편 좌석으로 들어온 안젤로 가야를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레스토랑 주인 말로는 자주 손님을 데리고 와 식사를 한다고 했다. 그가 비즈니스 런치를 즐기는 동안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누르며 조용히 우리의 음식과 와인을 즐겼는데,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미소를 지은 그가 테이블로 다가와 내 와인을 선택해주어서 고맙다며 악수를 청했다. 왜 그가 최고의 와인 메이커인 동시에 최고의 비즈니스 맨으로 꼽히는지 알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트라토리아 안티카 토레 / 사진 제공: 엄정선

안젤로 가야와 악수를 하게 해주었던 Gaja Cremes Langhe 2016 / 사진 제공: 엄정선

이 레스토랑에서는 두 번 식사를 했다. 모든 메뉴가 다 좋았지만, 계란 노른자를 주재료로 반죽한 타야린 Tajarin 파스타는 한 번 맛본 이후로 인생 파스타가 돼버렸다. 타야린은 레스토랑에 따라 여러 재료를 섞어서 내놓는데, 부재료와 상관없이 면 자체의 부드럽고 고소한 식감이 일품이다. 피에몬테의 알바 Alba는 세계 3대 진미인 트러플의 원산지인 만큼 트러플을 얹은 타야린 파스타는 꼭 맛보기를 추천한다. 레스토랑이 부담스럽다면 면과 트러플을 직접 사서 만들어도 된다. 알바 시내에는 제철이 아니더라도 화이트와 블랙 트러플을 상시 준비해 놓는 곳이 꽤 된다. 트러플을 얇게 슬라이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용 나이프를 사야 하지만, 고군분투 끝에 직접 만든 트러플 타야린을 맛본다면 수고스런 과정과 들어간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트러플이 듬뿍 올려진 타야린 파스타 / 사진 제공: 엄정선

우리 부부는 마을 내에 도보로 갈 수 있는 대부분의 와이너리를 들렀다. 이탈리아 와인 여행을 계획하면서 꼭 성사되기를 기원했던 가야 방문이 현실로 이루어져서 더욱 뜻깊었다. 이외에도 프로두토리 델 바르바레스코 Produttori del Barbaresco, 로께 데이 바르바리 Rocche dei Barbari, 보파 Boffa를 방문했는데, 각각의 매력이 있기에 모두 추천한다.

가야는 1859년, 현 오너인 안젤로 가야의 증조할아버지가 바르바레스코에 설립한 와이너리다. 와이너리를 세계적인 명성으로 끌어 올린 장본인은 바로 안젤로 가야. 그는 20대 초반인 1961년부터 와이너리를 도맡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포도 재배와 와인메이킹에 있어서 선조들의 방식을 답습하기보다 현대적인 방법으로 도약을 꾀했던 그는 이탈리아 와인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그를 더욱 빛나게 한 건 이미 한 차례 언급한 세일즈 정신. 안젤로 가야는 그의 와인, 나아가서는 이탈리아 와인을 홍보하기 위해서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발걸음을 옮기는 열정적인 사내다.

가야의 역사가 곧 바르바레스코의 역사이다 / 사진 제공: 엄정선

가야 와이너리의 방문은 특별했다. 투어의 시작은 지금의 가야를 만든 포도밭인 소리 산 로렌조 Sori San Lorenzo를 둘러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포도밭은 와이너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면 다다를 수 있다. 로버트 파커가 ‘네비올로 포도의 기념비’라고 찬양했던 그 현장을 둘러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억에 남을만하다. 이후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하는 와이너리 지상층에서부터 역사를 간직한 지하 셀러까지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지하셀러는 마을 지하를 터널처럼 연결해 맡은 편에 위치한 가야의 옛 양조장으로 이어진다. 양조장을 둘러본 후 시음실로 돌아와 조용한 분위기에서 오롯이 와인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전설의 소리 산 로렌조 포도밭 / 사진 제공: 엄정선

시음은 매일 가야 가문의 일원이 선택한 와인으로 이루어진다. 시음은 안젤로 가야의 아들 지오반니 가야 Giovanni Gaja가 함께 했고, 그는 한국에서 온 우리를 위해 가야 와이너리에 머물며 책을 집필한 에드워드 스타인버그의 <산 로렌조의 포도와 위대한 와인의 탄생> 한국 출간본을 인원수대로 준비해 선물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시음은 바르바레스코 Barbaresco 2015, 콘테이사 바롤로 Conteisa Barolo 2014, 소리 산 로렌조 Sori San Lorenzo 1999, 가이아 & 레이 Gaia & Rey 2006 순으로 진행됐다. 오크 숙성을 거쳐 너트 향이 감도는 화이트 와인을 가장 마지막에 시음하도록 구성한 것은 완벽한 순서라 생각된다. 모든 와인들은 평가가 무색할 만큼 그 자체로 완성된 와인의 면모를 보였고, 하나같이 섬세했다.

가야의 와인 테이스팅 / 사진 제공: 엄정선

60년대 카를로 보파 Carlo Boffa에 의해 설립된 보파 와이너리는 가야 와이너리 바로 옆에 위치한다. 글의 서두에 ‘잊지 못할 테라스’는 바로 이 보파 와이너리에서 경험한 것이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모든 와인은 글라스로 주문이 가능하기 때문에 잔을 넉넉히 채워 테라스에 앉아 바르바레스코를 둘러싼 광활한 포도밭을 한눈에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보기를 추천한다.

보파 와이너리 테라스에서 바라본 안개낀 바르바레스코

맑게 갠 보파 와이너리의 테라스 / 사진 제공: 엄정선

프로두토리 델 바르바레스코는 가야와 함께 바르바레스코를 대표하는 와이너리(협동조합)다. 1894년 알바의 왕립 양조 학교의 교수였던 도미지오 카바짜 Domizio Cavazza가 설립한 최초의 협동조합으로, 당시 바롤로에 가려져 있던 바르바레스코 와인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최초에는 <Cantine Sociale>라 불렸고, 1930년대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문을 닫았다가, 마을의 신부였던 마렌고 피오리노 Marengo Fiorino의 주도 아래 1958년 19개의 작은 와이너리들이 규합해서 협동조합을 재탄생시켰다. 현재는 51곳의 멤버, 100ha에 이르는 포도밭에서 바르바레스코의 네비올로로 진정성을 담은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협동조합 와인이라면 으레 품질이 낮은 것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줄 만큼 대단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오래전부터 파커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저명한 와인 평론가들로부터 최고의 바르바레스코 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르바레스코 마을 중심에 협동조합 사무실이 위치해 있고, 간단한 와인 테이스팅을 무료로 진행한다.

바르바레스코 와인 역사의 한 축을 써내려간 마렌고 피오리노 신부 / 사진 제공: 엄정선

로께 데이 바르바리 Rocche dei Barbari는 오로지 바르바레스코 마을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소규모 부티크 와이너리다. 이 말은 곧, 다른 지역 혹은 다른 나라로 전혀 유통되지 않은 채 오로지 마을에 위치한 에노테카에서만 와인을 시음하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마을을 여행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생소한 브랜드일 테지만, 개인적으로 바르바레스코에 왔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으로 추천한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2000년대부터 90년대 올드 빈티지 바르바레스코를 프리 테이스팅할 수 있었다. 특히 90년대 바르바레스코는 꽃과 마른 허브, 발사믹 뉘앙스가 인상적인 와인들이었다. 와인 가격 또한 와인이 가진 매력과 품질을 생각한다면 굉장히 저렴하게 느껴질 것이다.

로께 데이 바르바리의 에노테카 / 사진 제공: 엄정선

90년대 올드 빈티지 바르바레스코. 진한 오렌지빛을 띤다 / 사진 제공: 엄정선

바르바레스코 마을은 성인 걸음으로 20분이면 모두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다. 그러나 우리는 몇 번을 다시 방문해도 이 마을이 지닌 진정한 매력을 모두 다 찾아내지 못할 것 같다. 그만큼 한곳 한곳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보석 같은 와이너리들과 아름다운 포도밭, 그리고 훌륭한 시음실로 마을 안이 가득 채워져 있다. 마을은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지만 발길이 닿는 장소마다 우아함과 귀품이 흘러나왔다. 마치 바르바레스코 와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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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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