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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17부)

17. 와인의 산업화 1탄

19세기 초 황제 나폴레옹은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1812년 유럽 대륙의 무려 4분의 3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유럽을 휘몰아친 전쟁과 프랑스의 득세는 여러 가지 면에서 와인 산업에 크거나 작게 영향을 미쳤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시행해 유럽과 영국 간의 무역에 제재를 가한 것이다.

간단히 대륙 봉쇄령이 생겨난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자. 프랑스 혁명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불과 30세의 나이에 프랑스 정권을 손아귀에 넣은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외친 후 알프스를 넘어 강대국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다.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일으키며 그의 능력을 만천하에 입증한 나폴레옹은 1804년,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샤를마뉴 이후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됐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사진 출처: wikimedia

이듬해인 1805년, 나폴레옹은 시종일관 거슬리던 영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으나, 전쟁의 신이라 불렸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가볍게 제압했고 프랑스 육군의 위상은 전 유럽에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지형상 장점과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함대에 완패를 당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최종 카드로 내밀게 된 것이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 사진 출처: wikimedia

결국 이 대륙 봉쇄령이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산업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영국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던 국가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과의 무역으로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대륙 봉쇄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이를 어기게 된다. 이는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 길고 추웠던 원정은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대패로 이어졌고, 유럽 각국은 반 나폴레옹 기치를 내걸고 프랑스를 공격했다. 결국 한때 황제라 불렸던 나폴레옹은 그렇게 엘바 섬으로 추락하게 됐다.

본론으로 돌아가 프랑스는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을 따돌리고 유럽의 시장을 독점하려 했으나 생산력이 이를 따르지 못했고 다른 나라에서는 물자의 부족을 호소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봉쇄령 후에 유럽 여러 정부의 묵인하에 밀수가 횡행했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프랑스도 재수출과 내수를 겨냥하고 영국으로 와인과 브랜디를 수출했다. 한 마디로 대륙 봉쇄령은 유명무실한 칙령이었다. 실제로 1807년에서 1816년 사이 영국으로 수출된 프랑스 와인은 한 해 4,478배럴에 달했다고 한다. 이 양은 프랑스 와인 수출 총량의 무려 8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가파른 경사를 자랑하는 포르투갈의 도우루 밸리 / 사진 제공: 배두환

재미있는 사실은 프랑스 또한 암암리에 대륙 봉쇄령을 어기면서, 1세기 동안 영국 와인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포르투갈이 대륙 봉쇄령에 동조하기를 거부하자 제재에 나섰다는 점이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1807년에서 1809년 사이 도우루 강 인근의 와인 생산지로 침공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도우루 상류에 위치한 도우루의 고급 포도밭들이 워낙 경사가 급해서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파른 산기슭에서 퍼부어 대는 포화를 프랑스군이 버티기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두 나라의 전쟁 때문에 도우루 와인 생산업자들은 생활과 직업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고충을 겪었다. 포도밭과 와이너리에서 일할 고급 인력들이 군대로 끌려가기도 했고, 외국 군대들이 와인 저장고를 수시로 털어가기는 한편, 포트 와인의 유통을 전담했던 영국인들이 전쟁을 피해 달아났다.

포트 와인을 선적하는 포르투 항 / 사진 제공: 배두환

하지만 와인의 생산과 거래는 예상외로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수출량의 감소는 프랑스나 스페인군이 충당했고 종전 후 본국으로 돌아간 군인들이 새로운 소비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다만 문제는 더 근본적인데 있었다. 포르투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 상인들이 전쟁의 포화를 피해 대피했고, 네고시앙이 사라졌기 때문에 포르투갈 와인의 가격이 치솟았다. 특히 1811년과 같이 흉년이 든 해의 포트 와인의 가격은 무서운 속도로 상승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트 와인의 사기 및 위조 행위가 발각되었고, 이로 인한 소비자들의 불신 때문에 영국에서의 포트 와인의 인기가 서서히 낮아졌다.

포트 와인 대신 자리를 꿰찬 셰리 와인의 숙성실 / 사진 제공: 배두환

어느 곳의 몰락은 다른 곳의 부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포트 와인의 하락세는 스페인의 전통주인 셰리의 인기로 이어졌다. 1814년에서 1824년 사이 영국이 수입한 와인 가운데 셰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5분의 1에 불과했지만, 1826년에서 1840년 사이에는 5분의 2로 증가했다. 스페인에서 수출하는 셰리의 무려 10분의 9가 다 영국으로 팔려나간 수치라고 하니, 당시 영국인들의 셰리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셰리의 수출붐 덕분에 1817년에서 1850년 사이 헤레스의 포도 재배 면적은 50퍼센트 증가했고 1870년까지 다시 50퍼센트가 늘어났다.

모젤 강 유역의 리슬링 포도밭 / 사진 제공: 배두환

나폴레옹의 영토 확장이 와인에 미친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는 ‘교회의 경제력 약화’다. 나폴레옹은 영토 확장을 유럽 전역의 문화 수준을 프랑스에 맞추는 계기로 생각했고, 특히 ‘교화 운동’이야말로 그의 사명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교화 운동의 주목적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경제력 약화였다. 프랑스 군은 1790년대 초기 혁명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 소유의 땅과 맞닥뜨릴 때마다 모조리 압수해 일반인들에게 팔아넘겼다. 1803년 한 해 동안 모젤 지방에서 프랑스 정부가 몰수한 포도밭은 무려 전체의 4분의 1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일반인’이라고 하는 것은 농부와 같은 서민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정부가 팔아 치우는 땅을 살 만한 여력이 있는 부유층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혁명 정부가 프랑스 내 교회의 토지를 몰수해 경매에 부치고, 이를 넘어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에서 이와 똑같이 정책을 시행하면서 중세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관행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도 끝이 났고,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안정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패전의 피해를 비켜 간 프랑스의 포도 재배 산업은 18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던 확장세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1828년 무렵 프랑스의 포도밭 면적은 20,000제곱킬로미터에 달했는데, 이는 전 세계 와인 생산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면적이다. 지금은 프랑스와 세계 와인 생산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이탈리아의 포도 재배 면적도 겨우 프랑스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오히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이탈리아를 앞섰다고 한다. 어떻게 프랑스 와인이 세계 와인의 선두에 설 수 있었느냐에 대한 작은 해답이기도 하다.

대자연으로 뒤덮인 프랑스 남부는 천혜의 포도 재배지다. / 사진 제공: 배두환

1800년대 프랑스 와인은 몇 가지 이유로 진정한 ‘산업화’라는 용어를 쓸 수 있게 됐다.

첫째, 혁명 정부와 나폴레옹 시대에 상당한 수준으로 증가한 포도밭이 계속해서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랑그독 지역이 독보적이었다. 1800년 이 지방의 포도 재배지는 650제곱킬로미터에 불과했지만, 1869년에는 랑그독의 작은 현인 에로(herault)에서만 무려 2,260제곱킬로미터가 포도 농사에 사용되고 있었다.

두 번째 노하우의 발전이다. 포도 재배자들은 가지치기와 수확이 간편한 평지와 완만한 경사지에까지 포도나무를 심었다. 특히 그르나슈처럼 생산량이 많은 품종이 대거 등장했고, 특히 그중 재배하기 덜 까다롭고 마찬가지로 생산량이 매우 좋은 가메가 루아르와 부르고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즉, 기나긴 전쟁 후 포도 재배자들은 어떻게 하면 적은 면적에서 많은 포도를 재배해서 많이 와인을 만들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철도의 개통은 와인 산업에 일대 변혁을 이루어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바로 철도의 확산이다. 기차는 시골에 위치한 와이너리에서 인구가 많은 도시까지 쉽고 빠르고 저렴하게 와인을 공급해주는 혁신적인 운송 수단이었다. 프랑스는 파리를 중심으로 중앙 집중화가 잘 된 나라다. 수도에서 출발한 철도는 포도나무 뿌리처럼 세부 주요 와인 생산지까지 잘 뻗어 나갔다. 부르고뉴의 디종에서 파리까지 연결하는 철도는 1851년에 개통되었는데, 보르도 철도 노선보다 2년이 빨랐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부르고뉴 와인은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875년에는 프랑스 전역을 포괄하는 철도망과 와인 시장이 탄생했다. 철도의 등장 덕분에 파리 시민들은 전국에서 생산된 품질 좋은 와인을 손쉽게 마실 수 있게 됐고, 아이러니하게도 품질이 그저 그랬던, 파리 근처의 포도밭들은 사양길을 걸었다.

최근에는 내수보다 수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와이너리가 많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본격적으로 범세계화가 진행되면서 프랑스 와인들은 국제 시장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특히 1840년부터 미국으로의 수출길이 열리면서 와인의 산업화는 더욱 가속됐다. 물론 미국도 훌륭한 와인 생산지였기 때문에 수출이 계속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도 19세기 들어서 고급 와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기는 했지만, 프랑스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다. 바롤로 정도가 비벼볼 수 있는 아이템이었고, 지방 분권화가 너무 뚜렷했기 때문에 일심동체로 이탈리아 와인을 알리기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피에몬테의 바롤로의 경우 그나마 외국에 알려진 편이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이탈리아 와인이 프랑스보다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치적 문제가 심각했다. 이탈리아 반도는 1860년 통일될 때까지 여러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중 일부는 독립 왕국이었고, 베네치아, 롬바르디아 등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속국이었다. 나라마다 법이 달랐고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는 물품마다 관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규모의 와인 시장이 형성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라별로 흩어져 있는 부유층은 고급 와인의 자체 생산을 뒷받침할만한 수가 되지도 못했다.

18세기에 바롤로를 영국으로 수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먼 거리 때문에 변질되지 않은 와인이 없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고급 와인을 생산하려는 노력은 이어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현재도 이탈리아 와인을 대표하는 리카솔리다. 그는 프랑스의 포도 재배와 와인 메이킹 기술을 연구하기 위해 론, 보졸레, 부르고뉴 지방으로 유학을 갔고, 이를 바탕으로 토스카나 와인의 발전 가능성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는 1846년산 보졸레를 음미하고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한다.

“좋은 와인이기는 하지만 맛이나 향 면에서 별다른 특징이 없고 황금빛이 도는 붉은색이 강렬하다기보다는 편안하게 다가온다. 맛이나 향은 키안티가 낫다. 하지만 키안티는 보졸레에 비해 약간 씁쓸하고 짙은 색상이 눈에 거슬린다는 단점이 있다.”

당시 어떤 와인들이 트렌드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리카솔리는 키안티의 재료가 되는 포도 품종을 산지오베제, 카나이올로, 말바시아, 트레비아노로 제한했고, 이들이 근대 키안티 와인의 포메이션으로 확정됐다. 또한 그는 품종뿐만 아니라 수확 방식도 바꾸고, 와인 제조 기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결국 그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와인의 양과 질을 모두 높이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1700년대 후반부터 몰락의 길을 걷던 키안티가 1세기 만에 부활하면서 이탈리아 와인 트렌드는 스위트에서 드라이 와인으로 전환됐다. 바롤로나 바르바레스코의 경우도 스위트 와인으로 출발했다가 이 시기에 드라이 와인으로 변모했다.

이탈리아 와인의 근대화를 이끈 바론 리카솔리 / 사진 제공: 배두환

독일 또한 19세기 들어서 와인의 품질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독일 내에서의 관세 철폐와 철도 개통은 싸구려 와인의 설 자리를 점점 잃게 했다. 소비자들이 외국의 좋은 와인 그리고 국내의 좋은 와인들을 이전보다 쉽고 값싸게 마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은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독일의 와인 생산업자들은 각지에서 협회나 협동조합을 만들고 정부는 와인 연구 기관을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와인 생산지를 제한하고 레이블 표기의 기준을 정하는 길고 고된 작업을 시작했다. 1830년대 팔츠의 경우 품질을 무려 65등급으로 나누는 표기 제도를 채택했다고 한다.

추운 기후의 독일 포도밭은 당도 확보가 중요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그리고 바로 이때 독일의 그 유명한 당도 용어 체계가 확립됐다. 독일은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포도 수확 시기가 늦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당도가 한껏 오른 포도를 가지고 와인을 만드는 것이 일종의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기본 베이스였다. 때문에 이를 등급으로 나누고 부르는 용어를 채택하게 되는데, 이때 슈패트레제, 아우스레제, 베렌아우스레제 같은 용어들이 등장하게 됐다. 아이스바인도 마찬가지. 나폴레옹이 일으킨 긴 정복 전쟁이 끝난 후 독일 또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와인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됐고, 결국 19세기 말부터는 유럽의 주요 와인 수입국이 됐다.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드디어 끝이 난 길었던 전쟁. 간만에 찾아온 달콤한 평화 속에서 프랑스와 인근 유럽 국가들의 포도밭은 보다 민주적으로 확장됐다. 특히 철도의 등장은 품질이 낮은 와인을 생산하던 지역의 몰락을 가져오게 됐고, 랑그독과 같은 대량 생산 방식의 와인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와인의 산업화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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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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