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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하게 적셔주는 도시 : 스톡홀름

심플하게 적셔주는 도시 : 스톡홀름

신동호 2016년 5월 23일

 

꽃보다 할배가 걸어온다. 몸에 꼭 맞는 슈트에 행커치프의 색이나 셔츠의 소맷부리에 달린 커프 링크스의 디자인까지 세심함이 엿보인다. 적당한 3:7 가르마로 깨끗이 정리된 머리며, 태양광에 빛나는 선글라스. 이 도시의 할배들의 품격을 보여준다. 스톡홀름의 첫인상은 이 할배로부터 시작됐다. 괜히 한국까지 스웨디시 남성들의 패션이 흘러 넘어 온 게 아니다. 패션 사대주의에 빠져도 어쩔 수 없어. 남성들을 이렇게 주의 깊게 관찰하는 여행도 참 드물다. 스톡홀름의 일정은 도착 이후 미뤄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 숙제를 해야 한다. 일단 내 숙제를 도와줄 관광 안내소를 찾아 들어갔다. 스톡홀름 카드를 구입하면, 대부분의 일정은 소화할 것이란 믿음으로 안내소 내부를 돌아봤다. 사실 앉고 싶었다. 앉을 자리를 탐한 곳, 천연색으로 일관한 폭신한 의자 들. 맞다, 여기는 이케아의 나라. 내 첫 여행지는 쉼을 제공한 이케아 제품에서 힌트를 얻었다.

[사진 001] 스톡홀름 관광 안내소 내에 비치된 이케아 의자들

[사진 001] 스톡홀름 관광 안내소 내에 비치된 이케아 의자들


한국에서는 한 때 이케아 IKEA가 뜨거운 감자였다. 국민 호구 취급, 일본해 지도 논란 등 노이즈 마케팅이 판을 치는 중에 광명점이 개장하였다. 역시 예상(?)대로 줄 서서 쇼핑하는 풍경이 언론에 나오고, 갖가지 관련 정보들이 SNS를 타며 공유되었다. 숱한 논란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시장에 안착하였고, 주말 가족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원래 북유럽 사람들은 자신이 가구를 제작하며, 집을 꾸미는 것에 익숙하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제는 본인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키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으므로 직접 인테리어 하면서 적은 돈으로 본인 만의 공간을 꾸미는 욕구가 커질 거다. 아무튼 가구에 관심 없는 나조차도 스톡홀름에 있는 이케아 매장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실용적이면서 심플한 디자인, 사족을 쪽 뺀 기능과 그에 합당한 가격. 포크 하나라도 안 사고 못 나가게끔 하는 전략.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출구를 찾는 데부터 족히 1시간은 걸려 매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미로 같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는 출구가 가까울수록 값이 저렴해지는 필수품들이 진열된다. 그래서 단순히 눈요기만 하자고 결심한 사람도 손에 무언가 들고 나간다는 마술 같은 곳이다.

[사진 002] 스톡홀름 이케아의 전경.

[사진 002] 스톡홀름 이케아의 전경.

[사진 003] 일본해로 표시된 지도.

[사진 003] 일본해로 표시된 지도.

 

[사진 004] 이케아 내부.

[사진 004] 이케아 내부.

스톡홀름에 도착하면, 시내 중심가에서 이케아로 가는 버스 노선이 있다. 매일 월~금 10:00~19:00 까지 1시간 마다 정류장에서 매장으로 가는 버스가 있고, 다시 돌아오는 버스도 1시간 마다 승객들을 태운다. 이용요금은 무료다. 정류장은 스톡홀름 중앙역 바로 맞은 편에 있다. 다른 관광용 버스들도 이곳에 정류장이 몰려 있어서 잘 모를 경우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찾으면 된다. 이왕이면 아침 일찍 첫차를 타고 쇼핑하는 게 붐비지 않고 좋다. 이케아 매장은 푸드코트가 유명하다. 스웨덴의 물가에 비해 저렴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곳에 오면, 미트볼을 먹으라는 지령을 받아서 주저 없이 골라 먹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일부러 저녁때 이케아 가서 저녁을 먹는다는 말도 들었다. 이 점도 숨겨진 마케팅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케아 회원은 커피가 무료이다. 문제의 지도는 일본해로 표시되어 있는데,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고객이 수정한 듯싶다(사실 저런 모습이 더 안 좋은데…). 화장실 표기의 센스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대충 보고 나왔다 싶었는데도 2시간이 걸렸다. 아마 목적 지향적인 쇼핑이었으면 3시간은 필요한 곳이다. 3시간 동안 이케아 영화를 보고 나온 기분이다.

[사진 005] 이케아 셔틀버스.

[사진 005] 이케아 셔틀버스.

[사진 006] 이케아 화장실.

[사진 006] 이케아 화장실.

오전 내내 이케아에서 시간을 보낸 후 이젠 스톡홀름을 보고 싶었다. 거기 가면 스톡홀름이구나 하는 곳 말이다. 구글 지도를 켜고 무작정 가기보다는 묻고 싶었다. 다시 내가 묵고 있는 호스텔로 들어가 직원에게 답을 구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옆 친구들 일정을 훔쳐봤다. 일정의 시작에 적힌 글자는 바로 ‘감라스탄 Gamla Stan’. 발음하기 어려운 스웨덴 지명치고 외우기도 쉬웠다. 직원과의 상담을 뒤로하고 얼른 검색에 들어갔다. 그래 내가 찾던 곳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말해주는 게 미로 같은 좁은 골목 걷기였듯이, 스톡홀름에서는 바로 감라스탄이었다.

[사진 007] 감라스탄에서 흔한 골목의 전경

[사진 007] 감라스탄에서 흔한 골목의 전경

스톡홀름 증후군. 1973년 어느 여름,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침입한 강도가 경찰들과 대치하며 인질극을 벌였다. 인질 중 한 여성이 강도에게 연민 혹은 사랑을 느껴 인질범에게 동화된 사건이다. 현실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비이성적인 행동이란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왜 그 인질범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까.

스톡홀름의 구시가지인 감라스탄 Gamla Stan. 스웨덴어로 ‘오래된 동네’란 뜻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옛것이 고스란히 얹어져 있다. 유럽의 작은 골목들을 걸어봤지만, 이 동네만큼 인상적인 곳은 드물다. 일단 들고 있던 지도를 가방에 넣었다. 베네치아의 골목은 너무나 복잡하고 거리마다 붙어있는 리알토 다리의 표지판을 의지한 채 걸었기에 지도를 포기했지만, 이곳은 달랐다. 세계에서 가장 좁은 골목이 있는 동네라서 그런지, 마치 미로에 내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골목이 좁을수록 허락되는 빛의 양은 인색해진다. 낯설었던 이 동네에 정이 들기 시작했다. 한번 지나간 길을 시간이 지나 다른 출입로로 걷다 보면, 완전 새로운 느낌이다. 걷다가 지치면 대광장에 멈춰 앉아 숨을 고르면 된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도시다.

[사진 008] 감라스탄을 걷다보면 몸을 비집고 웅크리고 가야할 코스(?)들이 있다.

[사진 008] 감라스탄을 걷다보면 몸을 비집고 웅크리고 가야할 코스(?)들이 있다.

색색으로 저마다의 모양새를 갖춘 건물들이 울타리가 되어 만들어진 대광장. 감라스탄을 거닐면서 베네치아와의 비교분석이 잦았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대광장으로 생각하면 실망이 크겠지만, 작은 골목이 많은 감라스탄의 풍취와는 잘 어울리는 광장이다. 현재는 스톡홀름 시민이나 관광객들의 휴식처 혹은 거리 공연의 장소로 이용되지만, 1520년에는 이곳에서 ‘스톡홀름 대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당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의 침입에 저항한, 바사 왕의 아버지를 포함해 약 90여 명의 귀족 등이 단두대 처형당한 비운의 장소이다. 과거의 아픔이 묻어 있지만, 지금은 특색있는 카페가 줄지어 있는 스톡홀름의 중심부이다. 광장 한가운데는 예전에 식수 역할을 했던 분수대가 있다. 분수대에 뛰어들고 싶은 건 세계의 모든 어린이에게 해당하는 사항인가보다. 분수대를 등지고 마주 보는 곳에는 스웨덴 한림원이 있다. 지금은 증권거래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매년 노벨 문학상을 심의하고 발표하는 곳이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여러 골목이 나 있는데, 제화거리, 대장간거리, 독일 비탈거리 등이 있다.

[사진 009] 여행객과 로컬들의 공동 쉼터, 대광장

[사진 009] 여행객과 로컬들의 공동 쉼터, 대광장

[사진 010] 대광장 안에 있는 분수대. 아이들의 놀이터.

[사진 010] 대광장 안에 있는 분수대. 아이들의 놀이터.

올 화이트 복장을 한 사내가 일반인 포스로 지나간다. 아마도 광장 어딘가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퇴근하는 길인가보다. 그 옆으로 버스킹하는 두 청년을 만났다. 바이킹 민족이라 그런지, 악기도 남다르다. 중세시대 전사들이 사용했을 법한 방패를 개조해 퍼커션처럼 박자를 쪼갠다. 만화 볼 일 많아, Comics Heaven이란 만화 전문점에 발을 멈췄다. 이 가게 안에는 만화책은 기본이고 관련 용품들이 디스플레이되어 있다. 내가 좋아했던 ’20세기 소년들’도 만났다.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사장님은 스웨디시가 아닌 히스패닉 같았다.

[사진 011] 마치 아랍인이 연상되는 복장을 하고 다니는 청년.

[사진 011] 마치 아랍인이 연상되는 복장을 하고 다니는 청년.

[사진 012] 특이한 악기로 버스킹하는 청년들

[사진 012] 특이한 악기로 버스킹하는 청년들

디자인의 도시답게, 저마다의 아우라가 돋보이는 소품들을 자세히 보려 일시 정지를 반복했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거나 디자인 학도들이 필수로 거치는 곳이 스웨덴이다. 디자인에 문외한 나이기만, 스웨덴 – 좀 더 광범위하게 북유럽 -의 디자인은 ‘실용’에 소실점이 모이는 듯하다. 화려함보다는 절제의 미학이 작품에 녹아 있다.

[사진 013] 상점마다 스웨덴의 디자인을 가늠할 수 있는 상점들이 있다.

[사진 013] 상점마다 스웨덴의 디자인을 가늠할 수 있는 상점들이 있다.

辵 [쉬엄쉬엄 갈 착]. 스톡홀름을 여행하는 나흘 동안 매일 감라스탄엘 들렀다. 절대로 과하게 돌아다니지 않았다. 30분 걷고, 앉아서 그 30분을 되새김질하고. 다시 일어나 새로운 코스를 소화했다. 내게 북유럽 어디가 좋냐고 물으면, 난 망설임 없이 스톡홀름의 감라스탄이라고 답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는 곳은 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만족도가 높은 곳임에는 분명하기에 추천한다.

[사진 014] 육신이 피로하면 쉬어가자.

[사진 014] 육신이 피로하면 쉬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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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발로 기억하는 보헤미안, 혀로 즐기는 마포술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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