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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질된 과거의 가치, 술은 죄가 없다.

변질된 과거의 가치, 술은 죄가 없다.

김세원 2019년 10월 21일

자그마치 51년 만의 일이다. 2019년 6월, 드디어 정부 당국이 주류세 부과 방식을 바꿨다.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이는 단순히 시중에 도는 맥줏값이 더욱 저렴해질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실로 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나라의 주류세 부과 방침과 주류행정의 인식은 여전히 근대와 전근대라는 상반된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틀에 완전히 갇혀 있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 틀마저도 갖가지 모순의 집합체였다. 농림부와 농업진흥청을 위시한 한쪽에서는 얼핏 ‘전통문화’의 일환으로 술을 장려하면서도 다른 쪽에서는 ‘범죄의 매개’로 보아 터부시했다. 한때 대통령이 조폭보다 무서운 ‘주폭(酒暴)’을 말하던 시절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관련 업계 종사와 전문가조차 정부의 의도를 제대로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대체 술에 대한 근대적 인식은 무엇이고 전근대적 인식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 동아시아고대학회 이도학 선생이 2016년도에 동아시아고대학 학술저널에 등재한 논문 <한국 고대사회에서의 술의 기능> 국문 초록 말미에 비교적 명료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여 잠시 인용한다.
“한국 고대사회에서 술은 祭儀의 필수품이라는 종교적 素材인 동시에, 사교와 향락의 수단뿐 아니라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다방면에서 이용되었다.”
요컨대 술은 동아시아 농경 사회의 공동체 구성원을 한데 모으는 꽃이고 총아였다. 오랫동안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종교 분야에서 그러한 역할을 했다. 일본의 여러 마쯔리(축제) 현장에서 ‘감주(甘酒)’가 늘 빠지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근현대 사회로 접어든 오늘에도 술을 대하는 세간의 인식이 관대한 점 역시 이러한 술의 전근대적 역사성에 기인했다.
바로 그런 와중에, 파도처럼 ‘근대 사회’의 제도와 습속이 우리 사회로 밀려들었다. 술이 조금씩 골칫덩이가 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전근대 사회에서 술 한 잔에 담던 풍류와 여유는 근대 사회에서는 성립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초록빛 독주인 압생트가 빈민과 노동자를 달랬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역할을 싸구려 희석식 소주가 도맡았다. 향조차 느낄 수 없는 역한 쓴맛이 이때부터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술’의 이미지로 고착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술이 맛이 없어졌다. 전근대 시대를 살던 우리의 선조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더 맛없고 향조차 없는 밍밍한 술을 먹어야만 하는 현실이다. 물론 이런 견해에 주당을 자처하는 혹자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래 국산 주류에 대한 소비자의 평가를 떠올리면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물 탄 맥주’란 단 한 줄의 조소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국산 주류가 처한 현실이다. 소비자조차도 국산 술이 맛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가운데 2019년 6월, 정부가 주류세 부과 방식을 개정했다. 가격에 비례하여 세금을 붙이는 종가(價)세에서 알코올 도수나 주류의 양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종량(量)세로 세금 부과 방침을 변경한 것이다.
이에 따라 본디 생산 단가 자체가 높아서 출고가도 비쌀 수밖에 없었던 각지의 로컬 브루어리나 소규모 펍에서 생산하는 수제 맥주의 판매가 좀 더 탄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덩달아 가격이 저렴해진 국산 맥주의 성장세도 두드러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단순히 시장의 판도 변화만으로 이번 주세법 개정을 평가하기엔 아쉽다. 가령 탁주와 맥주에만 한정한 정부의 주류 과세 방침 변경은 대량생산하는 공장 맥주보다 다품종 소량생산하는 수제 맥주나 수제 막걸리 등에 우선 좀 더 유리하다.
앞서 언급한 개념을 통해 이를 다시 정리하자면, 간단히 말해서 맛있는 술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생겼다. 생산자가 단순히 저렴하게 대량으로 술을 만드는 것보다 비용을 들여 맛있는 술을 빚을 유인이 아주 조금 더 생겨났으니. 그렇다는 건 본디 싼 독주를 단순 양껏 마시고 질펀하게 취하는 지금의 주류 문화 역시 변화할 조짐이 인다고 해석해도 좋을까. 맛있는 술을 적당히 마시고 즐기는, 근현대인들이 놓쳤던 옛날의 ‘여유’가 되살아났다고.
이번 주류세법 개정은 업계와 시장에 모두 큰 변화다. 그러나 이 족적이 더욱 유의미하게 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술을 대하는 오늘의 인식 자체를 확실히 바꿔야 하지 않을까? 정부의 주류 과세 제도 개편 시도가 바로 그러한 변화의 신호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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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일상을 여행처럼, 다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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