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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ific Crest Trail Hiking 2018_02 – 혼자라도 괜찮아.

Pacific Crest Trail Hiking 2018_02 – 혼자라도 괜찮아.

선경 고 2018년 4월 27일

Campo(0km)~Stagecoach RV Park 갈림길(122.8km)

2018년 3월 30일.

드디어 4278km의 시작이다. 일주일 혹은 한 달을 잘 걸을 수 있을까? 아니면 길의 끝까지 잘 걸어 캐나다로 갈 수 있을까? 그 결과를 알 수 없으니 일단 걸어 볼 수밖에.
길은 출발점에서 벗어날수록 초지가 늘어난다. 주변에 집의 수도 점점 적어진다. 그럴수록 긴장감은 늘어간다. 오늘 하루라도 무사히 잘 걸을 수 있기를….

[사진01] 피씨디를 알리는 다양한 표식들. 공통점은 가운데 화살표 모양의 나무가 새겨진 점이다.

떠나오기 전 23일 새벽,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면서 이 짐을 들고, 먹고 살 생각을 하니 새삼 두렵고 막막했다. 그래도 시작하면 일단 어떻게든 된다는 것. 시작하기 직전이 가장 두렵다는 것을 알기에 자꾸 밀려오는 두려움과 싸우며 뒤로 빠지려는 엉덩이를 부여잡고 짐 정리를 마저 끝냈다. 막막하면서도 흥분되는 느낌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참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 흥분과 두려움 때문에.

[사진 02] 출발점 너머로 보이는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아침 7시 40분, 멕시코 국경의 캄포를 출발했다. 6L의 물과 5일 치의 식량을 담은 가방은 무겁지만, 이제 막 시작했다는 흥분과 함께 비로소 실감이 났다.

[사진03-01] 사유지라도 PCT 하이커라면 예외로 통과할 수 있다.

[사진03-02] 3miles 에서. 아직 덥지 않아 신이 났다.

사막 구간. 이따금 부는 바람에 즐겁기도 잠시, 오전 10시가 지나니 뜨거워진 땡볕에 더위를 먹을 것 같다. 가벼운 것을 최고로 치며 칫솔 손잡이마저 잘라서 가져간다는 Ultra Light 하이커들이 왜 우산을 준비물로 추천하는지 절실히 느꼈다.

[사진04] 이 길 위에 내리쬐는 햇빛을 가릴 것은 없다.

길은 스위치 백(지그재그로 산을 올라가는 방식)이 많아서 곧바로 산이나 언덕을 넘지 않는다. 금방 저 언덕을 넘을 것 같은데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언덕 하나를 넘어가니 이것도 나름대로 곤욕이다.

정오가 조금 지나서야 다른 하이커들이 쉬고 있는 작은 나무 그늘 옆에 우산으로 그늘을 만들어 한 시간 반쯤 전에 물을 부어 불려놓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다른 네 명의  하이커는 그늘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다. 도저히 더워서 못 가겠단다.

점심을 먹으며 나는 남들보다 느리니 부지런히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가다 보니 Trail Angel House에서 함께했던 하이커 2명이 18.3km에 있는 CS에 텐트를 치고 있다. 잠깐 쉬면서 고민해 봤는데 이제 겨우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지만 하우저 크릭(다음 캠핑 가능 장소)까지 두 시간 더 걷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나도 자리 잡고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텐트에 눕자마자 마음보다 몸이 더 지쳤는지 그대로 뻗어버렸다. 잠결에 수다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누가 왔나 보다. 한참을 자다 깨다 일어나보니 점점 인원이 늘어나 3명이 머무를 수 있는 곳에 8명이 모였다. 무거운 짐을 지고 더 가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기에 환영인사를 나누며 다닥다닥 텐트를 설치하고, 잠깐의 수다를 떨다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곳에서 해가 지면 모두들 잠자리에 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Trail Angel House에서부터 이곳까지 나흘동안 한국인 심지어 동양인은 단 한 명도 보지 못 했다는 것이다.

31일 새벽 4시 20분 기상, 5시 출발. 다들 물이 부족한 관계로 아침 일찍 일어나 뜨거운 태양이 나타나기 전 이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느릿느릿 체력이 올라오는 탓에 제일 꼴찌가 되었고,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서 Trail Angel House에서 본 사람들을 지나치면 인사도 하고, 혼자 밥도 먹는다. 오늘 아침은 일본 재난 식품으로 판매되는 동결건조식이다. 찬물을 부어도 조리가 되어서 일본 등산객들도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사진05]일본 동결건조 카레맛 밥. 차갑지만 꿀 맛이다.

하루 사이에 익숙해진 풍경에 더워지기 시작할 즈음, Lake Morena Camp Ground에 도착했다. 보통 4월 중순~말경 이곳에서 PCT의 시즌 오프닝 행사 등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날짜가 맞지 않으니 잠시 쉬면서 바람도 좀 쐬고 부족한 물을 물통에 채워가는 곳으로만 생각했다. 뒤에서 누군가 어설픈 발음으로 나를 부른다. 어젯밤 같은 곳에 텐트를 쳤던 두 명의 하이커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곳에서 하루 쉬었다 가기로 했단다. 서로 안부를 빌어주고 그들은 레스토랑으로, 나는 다시 트레일 위로 돌아왔다. 목적지도 없이 정처 없이 걷다가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구하고, 해가 지기 전에 텐트를 치고 그곳에 머물러야겠다 생각하며 도착한 Boulder Oaks CG(Camp Ground). 놀랍게도 Trail Magic을 만났다. 트레일을 걷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먹을 것이나 마실 물, 의약품 등을 발견했을 때 마법처럼 눈 앞에 나타난다고 트레일 매직이라한다. 심지어 대가도 받지 않는단다. 맥주, 피자, 브라우니, 샌드위치 등 종류도 다양하다. 신기한 것은 나는 미안하고 고마워 어찌할 줄 모르겠는데 다른 이들은 다른 것은 없냐며 요구한다. 가뜩이나 트레일 매직이란 문화도 아직 낯선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낯설다.

[사진06] Boulder Oaks CG(Camp Ground)에서 만난 트레일 매직. 이들은 왜?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나 역시 출발 전부터 세계 곳곳의 선배 하이커들이 공유해준 정보들뿐 아니라 그곳에 다녀온 국내 하이커들의 블로그에 공개된 정보 공유 역시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내가 ‘시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을까. 출발 날짜가 가까워질 무렵에는 바로 곁의 지인들이 진심을 담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금전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 물품을 선뜻 건네준 사람, 이미 많은 장비를 지녀서 웬만하면 쓰던 것을 그대로 가져가려는 내 성격을 알기에 그곳에서 필요할까 싶어 샀다며 건네는 센스있는 소품까지…. 트레일 매직의 마음도 나의 지인들처럼 트레일을 걷는 사람들의 안부를 기원하는 것일테지만 일면식도 없는데다 다시 만날 일 또한 없을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더욱 놀라운 건 페이스북으로 인사만 건넸던 한국분이 혹시나 싶어 들렀다며 맥주를 사 들고 캠핑장에 찾아오신 일이다. 길을 걷는 것도 걷는 것이지만 이 도움을 다 어떻게 갚아야 할 지…. 감사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4월 1일. 어제 생각지도 못한 트레일 매직들을 만나고 일어나니 하이커 아저씨가 나를 부른다. 저녁 먹었던 테이블에 누군가 부활절 달걀처럼 삶은 달걀에 색색을 입혀 PCT라고 적어서 두고 갔다. 아침부터 이런 선물이라니…. 어제오늘 마음을 두들겨 맞는 기분이다. 달걀을 한 개 까먹고, 텐트를 접는데 입김이 나온다. 매쉬 텐트는 가벼워서 좋은데 아무래도 보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새벽에 절실하게 느꼈다. 좋은 침낭을 가져오길 잘 한 것 같다. 걷고 있는데도 쌀쌀하다. 종일 바람이 많이 부는데 그늘에서 바람을 오래 맞고 있으면 금방 체온이 떨어진다. 열심히 걷는다고 걷고 있는데 다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가버리니 죽자고 쫓아 갈 수도 없고, 그네들 두 걸음에 세 걸음씩 쫓아가도 내가 늘 마지막에 도착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격려하며 꾸역꾸역 잘 해내고 있다! 드디어 하루를 잘 걸어 마운틴 라구나 캠핑장 도착. 캠핑장은 한 구역 당 $25였는데 다른 하이커들과 함께 사용하기로 해서 10명이 각자 $2.5씩 냈다. 참 효율적이다. 같이 걸었던 세 하이커들은 레스토랑에 햄버거를 먹으러 가고 나는 한국식으로 3분 미역국에 동결건조 쌀을 넣어 고추장을 조금씩 덜어가며 먹었다.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니 지친 몸에 온기가 돌며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까지 첫 날 18.3km 둘째 날 23.6km 그리고 오늘 24.8km. 특히 오늘은 오르막도 많고 더 힘들었다. 곰이 나올 것 같은 숲을 지날 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쫓아갔다.

[사진07] 여기까지 온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곳곳에 서 있다.

춥다. 그늘이라 추운 것인지 Camp Ground가 산속이라 그런 것인지 엄청 춥다. 물을 받으면서 겨우 씻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온 몸이 아프다. 다리며 허리 안 아픈 곳이 없다. 자면서 계속 뒤척였다.

잠결에, 내가 아직도 한국의 집에 있고 이 트레킹이 닥쳐올 일이라 생각하며 고생할 생각에 끔찍해 하는 꿈을 꿨다. 눈을 떠보니 텐트 속 침낭 안에 누워있다. 순간 울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울컥 든다. 사실 친구랑 같이 오거나 연인이랑 같이 온 사람들, 아니면 여기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 이들이 서로 공유하고 대화하는 모습이 부럽다. 몸도 힘들지만 특히 이 순간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쉽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의 이 시간들을 누가 함께 이야기하고, 온전하게 공감할 수 있을까. 오늘은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 날인지도 모르겠다.

4월 2일

밤새 바람소리로 시끄러웠지만 오래 자서인지 걱정한 것 보다는 몸이 덜 아프다. 어른들 말마따나 잠이 보약인가보다. 오늘 아침에는 다들 Mt. Laguna Camp Ground 식료품점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출발한다.

[사진08] Mt. Laguna CG의 식료품점. 다양한 먹을거리와 함께 오래되어 먼지가 쌓인 와인병도 볼 수 있었다.

오늘의 길은 왜 이렇게 끝나질 않는 것인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고, 응원해 준 정성들에 부끄러워서라도 포기 못 하지 싶다가도 또 지리산 종주를 갈 것을 왜 타지에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엔 ‘걸어야 한다. 걸어야 오늘이 끝나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오늘 하루만이라도 끝내고자 아픈 발을 이끌고, 이 악문 채 걷는다. 다들 첫날부터 그런 생각을 한다는데 난 나흘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양호한 편인가?

[사진09] 뙤약볕에서 PCT 길만 바라보며 걷고있다.

첫날 LA 공항에 도착해서 유니온 스테이션 이동 중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니 하늘엔 한눈에 비행기가 서너 대씩 들어오고 멀리 산에는 할리우드 간판이 보여 ‘멀리도 날아왔네, 바다 건너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샌디에이고에서 밴쿠버까지는 비행기 타면 금방인데, 밥도 주고 물도 주고 영화도 보여주는 이 편한 세상에서 참 나, 굳이 걸어서 그 길을 가겠다고 차곡차곡 준비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먹거리, 잠자리, 마실 물까지 다 등에 짊어지고 말이다.

[사진10] 이 길에서 내 집과 식량이 되어줄 것을 담은 배낭.

걷기 시작한 지 닷새째다. 5일 내내 100km 넘게 걸었으니 이제 쉴 법도 하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은 같이 걷는 하이커들과 함께 Stagecoach RV Park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원래 마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저녁때 들어가서 숙소를 잡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다수의 의견으로 캠핑장에서 하루 묵고 내일 마을로 들어가 제로데이(Zero Day: 걷지 않고 마을이나 캠핑장에서 하루 쉬면서 재충전 하는 날)를 갖기로 했다.

10시가 안 된 시간, 100km 지점을 넘어섰다. 속도가 비슷해 같이 걷고 있는 하이커중 한 명의 트레일 네임은’ 라 스트라다’ 라고 한다. 작년에 이 길을 걸었지만, 폭설구간 때문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점심을 먹으며 그늘에 앉아서 배낭 내팽개치고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됐다. 며칠동안 물이 있을 것 같은 곳에 물이 있음에, 쉴 곳에 그늘과 바람이 있음에, 사소한 것에 감사하고 있다.

더불어 걷는 내내 캐나다 국경의 끝 지점이 아니라 오늘 저녁 배낭 내리고 텐트 펼쳐서 잘 곳만 생각하게 되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못가더라도 케네디 메도우까지 가자, 거기에 보내놓은 장비값이 얼마냐 등 가까이 보고 힘내고 있다. 안 아픈곳이 없지만 ‘어쩔수 없어. 아프더라도 가야 해. 오늘을 끝내야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그리고 나타난 멋진 풍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감탄한다. 삶이 단순해졌다.

도로와 만나는 곳이 가까워질 무렵 시원한 그늘이 보여 쉬고 있는데 라 스트라다 아저씨가 와서 반갑게 인사하더니 나더러 왜 이걸 하느냐고 묻는다. 나도 알고 싶네요. 했더니 웃으면서 자기도 그렇단다. 그것도 두 번째나… 그러니까요. 대단하셔요. 다들 왜 이걸 하고 있을까? 이 길의 어떤 매력이 그들을 이곳으로 끌어당겼을까?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이 길을 다 걸으면 알게 될까? 알게 된다면 이 길을 끝낼까?

[사진11] Stagecoach RV Park로 들어가는 도로와 만나는 갈림길에 도착하자 깨끗한 물과 진통제가 있는 트레일 매직을 만났다.

만나기로 한 지점에 트레일 매직으로 물이랑 진통제가 있다. 같이 걷던 하이커를 기다리며 먼저 도착한 라 스트라다 아저씨와 다른 하이커, 나 이렇게 셋이서 수다를 떨었다. 더불어 오늘 저녁엔 Stagecoach RV Park에서 텐트 쳐 놓고 맛있는 거 먹고 샤워, 세탁, 수영도 가능하단다. 수영이라고? 오기 전에 배워놓긴 했으니 빠져 죽진 않겠지. 그나저나 수영복이 없는데 어쩌지? 트레일에서 벗어났다고 벌써부터 쓸 데 없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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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 고

여행하는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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