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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칸타빌레 : Duchesse de Bourgogne(듀체스 드 부르고뉴)

맥주 칸타빌레 : Duchesse de Bourgogne(듀체스 드 부르고뉴)

백경화 2016년 8월 23일

 

지친 일상의 위로이자, 하루의 기분 좋은 마무리이자, 손쉽고 가볍게 취할 수 있는 휴식의 제공자. 오래전부터 치킨의 단짝으로 단독 출연의 기회는 줄어든 듯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맥주를 마시는 최고의 간지는 무엇에 집중하고 난 뒤 해방의 신호처럼 마시는 한 모금이다.

말 잘 듣는 모범생 언니들이 그렇듯이 나도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독한 소주의 쏘이는 듯한 알콜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는 나는 당연히 맥주를 주 종목으로 마셨다. 물론 배가 부르다. 500cc 잔에 두 번만 잔을 바꿔 마셔도 배가 터질 것 같고, 화장실에 들락거리기 시작하고, 마치 식도와 방광이 일자로 연결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 잔을 비우고 나면 필연적인 순서처럼 변기를 찾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때는 다 그랬다. 술을 잘 마시는 것과 많이 마시는 것은 동일어였다. 콧구멍에서 맥주가 뿜어 나올 정도로 마셔줘야 했다,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아! 상을 주는 때도 있다. 맥주 빨리 마시기 대회 같은 데도 나갔었다. 그리고 폭음의 끝은 병원행이었다. 위장 장애를 일으켰고 이것은 무용담이 되었다. 병원행 이후 개과천선하였다는 얘기는 스무 살에는 생각도 못 할 일이지 않나? 위경련이 나 바닥을 구를 지경이 되어도 겔포스 한 포면 다시 술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는 때다. 그러다가 정말 알콜에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때가 왔는데 그때야 일절 술을 끊었다.

내가 알콜에 약체가 되어 주류계를 떠나 있는 동안 이 바닥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일단 소주의 도수가 현저히 떨어졌으며, 수입 맥주의 양이 늘어났다. 그리고 보그에서 샴페인 광고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술이 단순히 술이 아니라 주종에 따른 스타일을 입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양으로 마시는 국산 맥주의 시대를 지나 수입 맥주 바의 얼음물에서 건져 마시는, 한 뼘이 조금 넘는 크기의 병맥주를 마시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맥주 주도가 생겨났다. 맥주를 마시는 것은 도시 노동자가 갖는 일상의 해방이자 위로였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가자면 딱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병이든 캔이든을 쥐고 입을 떼지 않고 꿀떡꿀떡 마시는 그 비주얼. 비록 늦은 밤 마시는 술로 아랫배는 나올지언정 맥주를 마시는 멋은 그런 것이어야 했다. 한 병을 마시든 두 병을 마시든 간에 반드시 공식은 지켜져야 한다. 이제는 콧구멍으로 맥주를 뿜어내는 일도, 필연적으로 변기를 찾아야 하는 일도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이후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수제 맥줏집이 나타났다. 나의 맥주 판타지는 재정비 되어야 했다. 바야흐로 바 호핑의 시대. 이태원 등지에 옹기종기하게 모여 있는 크래프트 비어 샵을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각 집의 맥주 맛을 비교하고 생소한 IPA와 에일의 맛을 비교 체험하는 그 재미.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에 동참하기에는 환경적 제약이 크다는 것이 문제였으니 일단 여태 마셔오던 맥주들보다 알콜 도수가 세다는 것과 제대로 바 호핑을 즐기려면 작정을 하고 상경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나는 기차를 타야 한다). 별 생각 없이 샘플러를 마시고 그 중 맘에 드는 것을 두세 가지 더 마셨다가 만취가 된 기억이 있다. 그리하여 나의 맥주의 역사는 홈플러스의 수입 맥주 벌크 상품으로 막을 내리는가 싶은 때에 선물 같은 희망의 빛이 내려졌다.

<사진 : 듀체스 드 부르고뉴>

수제 맥줏집의 매력은 마치 와인처럼 맥주를 양조하는 사람의 개성을 경험할 수 있고 다양한 맛의 맥주를 맛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맛을 찾아내는 재미에 있는데 너무나도 우연한 기회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맥주를 찾아낸 것이다, 그것도 백화점 슈퍼마켓에서 말이다.

<사진 : 듀체스 드 부르고뉴 2>

처음 한 모금을 마셨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왜 이 맥주를 골랐느냐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림이 예뻤다. 그리고 ‘BOURGOGNE’니까(나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 러버다).
이 맥주에 대한 어떤 사전 정보도 없었다. 게다가 다른 맥주보다 가격이 비쌌다. 예쁜데 가격이 비싸다면 유혹적이다. 뭔가 특별한 것이라는 기대가 상승한다. 거침없이 집어 들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잔에 따랐을 때 남다른 향기와 다크한 컬러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우어우어 마셔본다~ 하고 한 모금을 마시고 난 뒤 신랑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맥주가 상했나 봐!” 하늘이 무너졌다. 진공 상태일 유리병 안에서 맥주가 상하는 일도 있을까 하는 우려 외에 이쁘고 몸값도 비싼 것이 ‘상한 맛’을 냈다는 사실에 일종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꺄! 말도 안 돼.”하는 외마디를 지른 뒤 나도 맛을 봤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첫맛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다.
블랑 드 누아 샴페인에 사과 식초와 레몬즙을 아낌없이 짜 넣은 맛.

‘맥주보다는 샴페인에 가까운 맛. 홉과 효모가 내는 구수하고 쌉싸름한 맛과 거품이 감싸는 부드러운 목 넘김을 기대한다면 100% 실망.’이라고 지금은 다른 이에게 소개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나도 당시에는 그 맛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통닭이랑 같이 마시려고(진짜 옛날 통닭) 했는데 미친 듯이 치솟아 있는 산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맛을 깨끗이 지워버리려는 듯한 위상을 드리우고 있으니 뭘 먹어도 신맛뿐이었다. 그래도 비싸게 주고 샀으니 버릴 수는 없지 않으냐 싶어서 찔끔찔끔 마시다 보니 맛이 오묘하다. 전체적인 바디는 가볍고 산뜻한데 보통 와인의 구수함 대신 과일 풍미가 살아있고 약하지만, 와인의 타닌 같은 떫은 느낌이 피니쉬로 올라오는데 이것이 드라이하고 쌉싸름한 맛과 꽤 묘하게 섞이면서 전체적으로는 기분 좋은 상쾌함이 입안에 머문다는 점이었다.

이후 이 맥주의 진미는 750ml에서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인 그 사건 이후 이 녀석을 다시 한 번 맛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살살 일기 시작했고 다시 만났을 때는 750ml로 만났다. 한 번 경험을 했던지라 처음의 충격 대신 기대감을 충족 시켜주는 느낌으로 다가와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신맛 뒤에 나오는 쌉싸름한 맛은 다크 초콜릿. 이후에는 졸여서 태운 설탕과 같은 단맛까지 느낄 수 있었으니 그 복합적인 풍미로 보아 ‘부르고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이유가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란 말이다.

Duchesse de Bourgogne와 같은 플랜더스 레드 에일(Flanders Red Ale)은 연한 색과 어두운 색의 보리 맥아를 혼합해서 만들며(부드럽고 진한 성질을 부여하기 위해 종종 옥수수를 첨가하기도 한다), 이 두 종류의 맥아가 결합해 전형적인 적갈색을 낸다. 맥아에다 양조장에서 블렌딩한 효모와 건강한 락토바실루스균 집단이 포함된 박테리아를 주입하면, 맥주는 ‘푸드르(foudres)’라고 불리는 거대한 오크 탱크에서 잠을 자며 최장 2년 동안 숙성된다. 숙성을 마친 시큼한 에일은 농도와 균형감을 위해 만든 지 얼마 안 된 맥주와 블렌딩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맥주 여정은 세 번째 길에 도달했다. 폭음기를 지나 폼으로 마시기를 너머 이제는 맥주도 와인처럼 맛과 향으로 마시기에 이른 것인데 한 병을 마시더라도 집중해서 마시기가 핵심이다.
7월부터 시작된 폭염은 50일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고, 강한 햇빛과 뜻을 같이한 듯 떨어질 줄 모르고 함께 하는 꿉꿉한 습기는 의욕을 떨어뜨리는데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고 있다. 날씨로 인해 뭘 해도 집중력이 떨어지는 때에 그나마 집중할 수 있는 몇 가지 중 하나인 麥酒探味(맥주 맛 찾기)가 여름의 무더위를 이길 수 있는 수단이 아닌가 싶다.


– 참조 : 맥주의 모든 것, 조슈아 M. 번스타인,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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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화

여행 한 스푼, 와인 한 방울. 즐거운 와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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