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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목마르게 하는 소설 – 3. 은희경 <중국식 룰렛>

나를 목마르게 하는 소설 – 3. 은희경 <중국식 룰렛>

조나리 2020년 9월 7일

나는 복불복 게임이 싫다. 물론 도박도 마찬가지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 자에게만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윤리적 믿음 때문은 아니다. 내 잘잘못과 관계없이 순전히 운 때문에 손해 볼 가능성을 안 그래도 불확실한 인생에 추가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누군가는 순전히 운 덕분에 얻을 이익을 기대하며 판돈을 걸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렇게 낙천적인 사람은 아닌가 보다.

하지만 손해의 범위는 최대 몇만 원인 반면 이득 범위는 몇십, 몇백만 원까지도 가능한 복불복이라면 어떨까. 게다가 불복에 걸리더라도 당사자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며, 어찌 됐든 자신의 취향에 맞는 대가를 즐길 수 있다면? 해볼 만한 게임이라는 생각도 든다.

은희경의 단편 <중국식 룰렛>에는 그런 식으로 운영되는 싱글몰트위스키 바가 등장한다. 바의 주인이자 바텐더인 K는 각각 다른 술로 반쯤 채운 잔 세 개를 메뉴판 대신 손님에게 가져다준다. 손님은 세 종류의 술을 맛본 후 한 가지를 골라 주문하고, K는 손님의 시선이 닿지 않는 뒤편 셀러에서 술을 따라 서빙한다. 뭘 선택하건 가격은 동일하다. 술의 이름이 무엇인지, 얼마짜리인지, 셋 중 어떤 것이 가장 좋은 술인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종종 ‘값비싼 30년산’이나 ‘수집품 수준의 빈티지 위스키’가 세 잔의 술에 섞여들기도 하니, 고만고만한 술로만 리스트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위스키 맛을 잘 아는 손님이라면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에 희귀한 위스키를 마실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럼 위스키를 모르는 사람은? 바가지 쓸 확률이 높다. 그렇다 해도 세 가지 중 자신의 입에 가장 맛있었던 위스키를, 이미 지불하기로 마음먹은 가격에 즐기는 것뿐이니 심하게 억울할 일은 아니다.

어느 날 밤, 소설의 화자인 ‘나’는 꼭 들러 달라는 K의 연락을 받고 그의 술집으로 향한다. ‘나’ 외에 다른 손님이라고는 혼자 온 남자 둘 뿐이다. 아르마니 슈트에 에르메스 넥타이를 맨 청년과 이미 술에 취한듯 축 처진 중년 남자. K는 그 둘과 함께 술을 마시자고 제안한다. 그날 밤의 복불복 게임에서 가장 좋은 술—무려 72년산 글렌리벳 셀러 컬렉션—을 선택한 것은 저 두 사람뿐이라면서.

아르마니 슈트는 정말이지 같이 술 마시기 힘든 타입이다. 잔을 쥐는 방법에서부터 그날 서빙된 위스키에 대한 정보까지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자꾸 떠벌린다. 맞는 말만 해도 정도를 지나치면 짜증이 날 텐데 심지어 틀린 말 대잔치다. 자동차 부품을 납품한다는 중년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운 없는 사람인지를 강조한다. 빚을 내서 자재를 들였는데 공장에 불이 났다든가, 아내 몰래 보증을 서준 선배가 사기꾼이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다. 입대하면서 친구에게 여자친구를 부탁했는데, 제대하고 보니 그 둘이 애인이 되어있었다고도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16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중이다. 아내는 집을 떠났고, 그녀가 모아둔 싱글몰트위스키 열여섯 병만이 ‘나’의 곁에 남았다. 아내는 라가불린(Lagavulin)을 좋아했다. 특별히 슬픈 날이면 라가불린 16년을 마셨고, ‘그 술이 품고 있는 바다 냄새와 연기의 향이 자기가 자란 고향의 저녁 풍경을 떠올리게 해준’다고 말했다.

라가불린은 물레방아 오두막이 있는 작은 골짜기란 뜻이래요. 그걸 알고 나니 이 술이 더 좋아졌어요. 내가 좀 감상적이잖아요. 말해봐요. 장미 백 송이를 선물했던 여자는 많았지만 거기에 넘어간 건 나뿐이었죠?

지난 2016년, 라가불린은 200주년 기념 한정판으로 8년 숙성한 싱글몰트위스키를 출시했다. 그러나 ‘물레방아 오두막이 있는 작은 골짜기’에서 만들어진 위스키의 시초는 1816년으로부터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빅토리아 시대의 위스키 저널리스트 알프레드 버나드에 따르면 ‘아일라(Islay) 섬에서 가장 오래된 증류소’인 라가불린은 1742년부터 밀주를 제조했다. 다만 지금처럼 단일한 증류소가 아니라 10여 개의 개별적인 소규모 증류소에서 불법 위스키를 생산하는 형태였다. 농부이자 증류주 생산자였던 존 존스톤이 처음으로 ‘라가불린’이라는 이름의 합법적인 증류소를 세운 것이 1816년의 일이다.

라가불린 증류소가 자리 잡은 스코틀랜드의 아일라 섬은 피트(peat) 향이 압도적인 개성 강한 위스키를 만들기로 유명하다. 피트는 아직 완전히 탄화되지 않은 유기물 퇴적층으로, 아일라 섬에서는 부족한 석탄 대신 지천에 널린 피트를 때어 맥아를 건조해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입혀진 스모키한 향이 바로 ‘나’의 아내가 묘사한 ‘연기의 향’이다. 하지만 연기 냄새가 피트 향의 전부는 아니다. 누군가에겐 암모니아 냄새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병원 소독약 냄새로 느껴지는 오묘하고 톡 쏘는 아로마가 있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고수나 홍어, 블루치즈처럼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한번 빠지면 출구를 찾기 힘든 풍미다.

‘바다 냄새’의 원천은 보다 간단하게 추적할 수 있다. 아일라는 섬이니, 피트를 구성하는 재료들도 이끼와 해초, 해산물 등 바다에서 온 것들이다. 숙성 시 사용하는 오크 통도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바닷바람을 맞은 후에야 위스키 원액을 담을 자격을 얻는다. 아일라 위스키에서 짭짤한 바다 향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그런데 ‘나’의 아내는 슬픈 날 마실 위스키로 왜 하필 라가불린을 골랐을까. 연기 향과 바다 냄새가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지만, 그건 대부분의 아일라 위스키가 공유하는 특징이다. 혹시 그녀가 못 말리는 피트광이라면 페놀 수치(맥아가 피트 연기에 노출된 시간이 길수록 페놀 수치가 높다)가 압도적인 옥토모어(Octomore)나 아드벡(Ardbeg)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라가불린이 달위니(Dalwhinnie)처럼 달달한 꿀 향으로 처진 기분을 위로해 주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르마니 청년은 ‘여자들은 대개 달위니를 좋아’한다며 다시 한번 섣부른 짐작을 하지만 말이다.

“새 술을 마시면서는 게임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일종의 진실 게임인데, 룰은 간단해요. 한사람이 질문을 던지면 지적받은 사람은 거기에 대답을 하면 됩니다. 대답하고 나서 술을 한 잔 마시는 거죠. 단,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들통나면 곧바로 게임에서 빠져야 합니다.” (…) “대답을 못 하면 술을 못 마셔요. 원래는 벌칙으로 술을 마시는 거지만 이 자리에는 술 마시는 걸 벌로 생각할 사람이 없을 테니 반대로 하는 겁니다.”

두 번째 빈 병이 나왔을 때, K는 새 술을 내오겠다며 게임을 제안한다. 그는 사랑하는 ‘나’의 진심을 알고 싶어 계속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나’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1에서 9로 정직성에 점수를 매겨보라는 요구에는 ‘5점’이라고 답한다. 질문의 의도를 피해 간 것이다. 이는 아르마니의 질문을 받은 K도, K의 질문을 받은 중년 남자도 마찬가지다.

K가 그만 문을 닫아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 사람 모두 그날 밤의 파티가 끝났다는 걸 알았다. 취한 네 사람은 분명 운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단지 조금 운이 없을 뿐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단지 조금 불행한 것처럼. 그래서 단지 약간의 행운이 필요한 것처럼.

중년 남자는 시종일관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고, 얄팍함이 들통난 아르마니 청년도 나름대로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는다. K는 시한부고, 의사인 ‘나’는 이혼을 앞두고 있을 뿐 아니라 의료사고를 주장하는 환자 가족들과 합의에 어려움을 겪는 중이기도 하다. 그러나 네 사람의 눈에 비친 서로는 그렇게까지 지지리 운 없는 존재가 아니다. 진실게임에서 각자가 내놓은 답이 진실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그들이 정말 불운아인지 그저 때때로 조금 불행한 행운아인지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이 반이나 있는 컵’같은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슬픈 날에 라가불린을 마시던 ‘나’의 아내에게도 조금의 불행을 상쇄해 줄 약간의 행운이 필요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달위니처럼 달콤하지도, 아드벡처럼 무자비하지도 않은 약간의 행운 말이다.

라가불린 16년은 피트 위스키를 처음 맛보는 사람이라면 코를 찡그릴 만큼 피티하지만, 짭짤한 바다 내음 뒤로는 말린 과일의 향긋함도 감추고 있다. 피트 연기를 쐰 맥아가 발효와 증류를 거쳐 16년의 세월을 견뎌내면서 밸런스와 풍부함을 갖춘 호박색 액체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나’와 16년을 부부로 산 아내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또 자신의 인생이 그저 불행하고 씁쓸한 것만은 아님을 느끼기 위해 라가불린을 마셨을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알싸함 아래 숨겨진 적당한 달콤함을 필사적으로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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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리

애주 경력 15년차 북 에디터. 낮에는 읽고 밤에는 마십니다. / mashija@winevisi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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