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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긋한 쑥 향이 깃든 와인이 생각나는 계절

향긋한 쑥 향이 깃든 와인이 생각나는 계절

노지우 2021년 9월 28일

어느새 코끝에 스치는 바람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계절이 왔습니다. 이제 차갑게 칠링 된 와인 대신, 녹진녹진하고 두껍게 목으로 넘어가는 와인에도 슬그머니 손이 가는 때가 된 것이지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약초 같은 냄새가 감돌아 왠지 찬 바람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주정 강화 와인, 베르무스(Vermouth)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베르무스를 들어본 이라면 ‘어? 칵테일 베이스로 쓰이는 리큐르 아니야?’라고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베르무스는 엄연히 주정 강화 와인에 속하는 술입니다. 여러 가지 향료가 첨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증류주가 아닌 주정 강화된 와인을 베이스로 하는 Aromatized Fortified 계열이기 때문이죠.

[(좌) Wermut / (우) How to make Vermouth]

베르무스는 독일어로 향쑥을 뜻하는 Wermut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갑자기 무슨 쑥인가 싶겠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초록색의 쌉싸름한 식물 쑥이 맞습니다. 베르무스란 바로 여러 향초 중에서도 쑥을 가장 주된 재료로 만들어진 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술에 약초를 넣어 마시는 것의 기원을 찾자면, 무려 기원전 4세기 무렵의 고대 그리스까지 올라가야 할 정도로 오래된 문화입니다. 당시에 주로 쓰였던 약초도 역시 향쑥(Wormwood)이었죠. 소화를 돕고 위장병을 낫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쑥은 술에 담가 약으로도 사용하고, 음료로도 즐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화는 각 나라에 다양한 술의 모습으로 전파되는데요, 오늘의 주인공 베르무스나 스위스의 압생트(Absinthe), 그리스의 펠린(Pelin) 와인 등이 대표적이죠.

[(좌) Absinthe / (우) Pelin wine]

압생트는 쑥이 라틴어로 Absinthium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증류주에 쑥과 다른 향초들을 우린 후 이를 다시 증류해서 만드는데, 18세기 스위스에서 처음 사업화되었습니다. 그리스의 펠린 와인은 와인에 쑥이나 민트, 캐모마일, 로즈힙 등 다양한 향초를 넣어 일주일 가량 함께 발효시키는 형태의 술입니다. 압생트와 펠린, 두 가지 술 모두 여러 가지 향초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베르무스와 비슷하지만, 베이스가 증류주와 일반 와인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정 강화 와인에 쑥을 넣어 마시기로 유명했던 곳은 독일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본격적으로 상업화시켜 베르무스의 역사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바로 이탈리아의 상인들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이탈리아의 초대 왕가인 사보이 왕조의 상인이었던 Girolamo Ruscelli였죠.

[(좌) Girolamo Ruscelli / (우) Adriano Benedetto Carpano]

그는 상당히 큰 규모로 향쑥을 사들여 주정 강화 와인에 쑥을 비롯한 각종 향초를 넣은 술을 팔았고, 이는 당시 왕실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보이 왕조가 피에몬테 지방의 토리노로 수도를 옮기고 난 이후에도 이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786년 토리노에 베르무스를 생산하는 주류공장을 만든 Adriano Benedetto Carpano가 등장합니다. 그는 주정 강화 와인에 40여 개의 향신료를 주입해서 여러 가지의 레시피를 시도했고, 기존보다 훨씬 향긋하고 달달한 그의 레시피는 사보이 왕실의 공식 음료가 됨과 더불어 그의 가게를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게 됩니다.

베르무스의 인기는 이탈리아에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으로 계속해서 퍼져나갔고, 실제로 1813년 프랑스의 Joseph Noilly가 화이트 와인에 향신료를 넣어 드라이한 베르무스를 만들어냈죠. 그전까지는 주정 강화한 이탈리안 레드와인에 높은 당도로 만들어 오던 것과는 사뭇 다른 버전의 베르무스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베르무스를 생산하는 요즈음의 유명 브랜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좌) Punt e Mes / (우) 노일리 프랫 사진]

밀라노의 Fratelli Branca에서 생산하는 Punt e Mes에서는 짙은 붉은색의 높은 당도와 씁쓸함을 모두 갖춘 베르무스로 유명합니다. 처음은 찐득하게 달콤한 향으로 시작해서, 탄 오렌지를 연상시키는 기분 좋은 쓴맛으로 마무리되는 특징을 가졌다고 하죠.

또한 프랑스의 베르무스로 유명한 Noilly Prat은 드라이한 화이트 베르무스가 시그니처입니다. 이는 007 제임스 본드가 즐겨 마시는 보드카 마티니에 들어가는 술로도 유명하죠.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에 캐모마일과 용담, 비터 오렌지, 육두구 등을 넣어 블렌딩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화이트 베르무스와 딸기 리큐어를 섞어 만든 Chambéry로 유명한 Dolin과 현대에 이르러 가장 높은 판매량의 베르무스를 만드는 것으로 알려진 Martini&Rossi 등의 베르무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좌) 샴베리 돌린, 1870년 창립자인 페르디난드 돌린이 사망하자 그의 아내 Marie Dolin이 필라델피아 박람회에서 처음 선보인 샴베리 베르무트 / (우) 그리고 받은 상장]

이러한 베르무스는 현대에 와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칵테일의 재료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탈리아에서는 2017년 Torino IG Vermouth라는 원산지 보호제도를 만들 정도로 애정을 두는 와인입니다. 아부르쪼와 피에몬테 지역의 이탈리아 와인만을 사용해야 하고, 피에몬테 지역에서 나는 향초를 사용해야만 하는 등의 까다로운 조건으로 이탈리아의 정통 베르무스를 관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느 날 마티니나 맨해튼 칵테일을 마시게 된다면, 한 번쯤은 그 재료 중 하나인 베르무스를 샷으로 요청해보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오랜 역사의 향을 간직한 베르무스 덕분에 새로운 주정 강화 와인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오늘도 여러분의 다채롭고 향긋한 와인 생활을 응원합니다, San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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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우

“사고(buy) 사는(live) 것을 사랑하는 소비인간. 와인 소비의 즐거움에 빠져 버렸지.” / ed@mashij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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