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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통영.

봄, 통영.

백경화 2016년 4월 25일

봄, 통영.

떨어진 동백과 벚꽃

떨어진 동백 그리고 흩날린 벚꽃잎

벚꽃이 만개한 후 두 번 봄 비가 왔다. 상춘객의 주된 메뉴는 다른 꽃도 아닌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인데 무리지어 핀 화사한 모습은 열흘도 채 되지 못한 채 연두색 새싹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으니 10cm의 “벚꽃이 그렇게 좋냐 멍청이들아” 하는 노래도 이젠 어울리지 않게 됐다. 은근히 통쾌했는데 말이다.

떨어진 동백

떨어진 동백

딱 까놓고 말하자. 봄꽃 축제에 몰리는 인파는 야크 떼처럼 한꺼번에 이동하는 것처럼 보여서 이처럼 촌스러운 것도 없다 싶게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벚꽃의 최상의 아름다움은 만개 후에 있다. 일찍이 중2병의 감수성을 가진 다자이 오사무는 패전한 나라의 몰락한 귀족 여인의 처연함을 가지에서 떨어져 날리는 벚꽃잎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봄꽃을 노래한 이들은 만개한 꽃의 화려함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남도의 진한 정서를 노래한 서정주는 통꽃으로 떨어져 뒹구는 동백을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이라고 얘기했고, 탐스럽게 피었다가 낱낱이 떨어지는 목련꽃을 보고 ‘무너지는 봄’ 이라고 이야기한 사진작가도 있었고, 좀 강하긴 하나 ‘창녀가 된 첫사랑’이라 표현한 팝 칼럼니스트도 있었다. 유독 지는 꽃을 노래한 예술가들의 표현을 강하게 인상에 남긴 내가 마이너적인 감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별별 이름을 다 갖다 붙이는 꽃 축제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인파 속에서 과연 봄의 정취나 봄꽃의 한시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싶긴 하다. 물론 사람들이 느끼는 각자마다의 감상은 다르긴 하겠다만.
봄꽃 즐기기는 커피 브레이크 타임처럼 일상에서 우연히, 의식하지 않았지만 불현듯이 들어 온, 봄을 낳은 봄꽃의 낯섦이 주는 즐거움이나 겨울철 칼바람의 기억이 채 물러나기도 전에 불쑥 느껴지는 단 봄바람처럼 봄꽃은 그런 멋이 있는 것이다. 시기를 계산하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정하게 움직이는 그런 계획은 봄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래도 아니게, 찰나에 활짝 피었다가 변덕스러운 봄바람에 속절없이 가지에서 떨어져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날리는 가벼운 벚꽃잎이든, 최상의 상태일 때 그 자체로 툭 떨어져 흙을 묻히고 뒹구는 동백의 설움이든, 절정의 시절을 끝내고 낱낱이 떨어져 남의 발치에 치이는 비극을 맞이하는 목련의 최후이든 봄의 정서는 한순간 적으로, 빠르게, 봄은 이런가 하는 순간에 ‘아! 다 가버렸다!’ 하고 변해버리는 변덕스러움에 있다. 차마 붙들지 못한 아쉬움에 있는 것이다.

봄, 통영 여행은 절대로 꽃놀이 때문만은 아니다.
봄의 통영은 백석의 실연과 전혁림의 바다 색깔과 윤이상의 음악과 홍상수의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일상성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현실화시키듯이 찾아보게 되는 백석의 시 ‘통영’과 전혁림 미술관. 그리고 미술관이 있는 봉수골의 뭔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주택가와 바다를 접한 음악당에서 열리는 윤이상을 추억하게 하는 세련된 음악회, 중앙 시장에서 느낄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의 거친 맛까지 봄날의 통영은 일상에 기댄 다채로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멋을 가지고 있다.상춘객의 행렬에 지쳤다면 지금 통영을 찾는 것도 좋겠다. 꽃놀이에 달뜬 사람들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의 무리들이 한차례 지나간 곳에서 한숨을 돌리는 것도 꽤 근사한 여행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백석의 ‘통영’은 결국엔 어긋나버린 스물넷 청년의 가슴앓이를 담은 시이다. 한눈에 빠져버렸으나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인연은 계속해서 시간 차의 엇갈림만 만들었다. 이후 백석은 서울에서 자야를 만나 떠들썩한 사랑을 했으니 통영 여인 난과의 만남은 어쩌면 마냥 뜨겁기만 한 서툰 달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만 가슴이 말랑말랑한 순수 청년의 비통함과 애절함은 그가 남긴 작품에 그대로 남았다. 평안도 정주 청년의 담담한 언어는 곱게 잘 다듬어져 애타는 마음이 ‘울 듯 울 듯…… 내 사람을 생각한다.’ 정도로만 보이지만 그 비통함은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하필이면 옛 장수의 충성과 기개를 추모하는 충렬사에서 보이는 실연의 정서라니 상황의 아이러니와 백석의 한숨이 이루는 절묘한 모순이 시간이 지나간 지금에 와서 보면 뭔가 묘한 웃음이 비실비실 나게도 한다.

충렬사

충렬사

여행객 백석에게 통영은 서러움이 묻은 곳이었다면 전혁림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통영은 화가의 예술적 토대가 된 곳임을 느낄 수 있는 안정감과 에너지가 있다. 통영의 바다를 닮은 채도 높은 푸른색이 인상적인 미술관의 외향은 벌써부터 비범함이 느껴지게 한다. 마루를 깐 미술관 바닥은 안정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데 전시된 작품들은 매우 역동적이다. 화가는 태어난 곳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해야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오방색을 쓴 전혁림의 작품들은 토속적이면서도 화려하고, 날 것 그대로의 생기가 넘친다.
백석의 시에서의 통영은 낯선 이가 바라보는 설움의 공간이었다면 전혁림의 통영은 익숙한 이가 느끼는 생명의 공간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전혁림 미술관

전혁림 미술관

전혁림 미술관을 나와 걷다 보면 백석과 전혁림의 서로 다른 정서를 공감하며 조용히 걸을 수 있는 작은 동네 길을 하나 발견하게도 될 것이다.
전혁림 미술관에서 시작해 미륵산 입구까지의 길로 가로수가 벚나무로 조성되어 있어 벚꽃이 만개할 시점이나 시기가 조금 지나 꽃잎이 날리는 시점에도 걷기 좋은 길인데 조금 주의깊게 이 길을 관찰하다 보면 겉으로 보이듯이 조용한 주택가만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길은 마치 흑백 사진의 포인트마다 원색 필터를 입힌 것처럼 눈에 들어 오는 신선한 재치들이 숨어있다.

‘완전 수제 로스터리 커피집’을 표방하고 있는 파랗게 칠한 커피집은 로스팅 머신없이 주인장이 정말 ‘손으로’ 생두를 볶는단다. 그리고 이 커피집의 맞은편 집은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집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뾰족한 지붕, 그 앞에 정면으로 주차된 노란 승합차, 그 집 앞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그리고 뾰족한 지붕 위로 보이는 옛날식 목욕탕 기둥이 높게 솟아있다. 30년은 됐음직한 오래된 아파트 단지도 이 길에 섞여 있고, 역시나 오래 됐음이 분명한 허름한 가게들은 산 밑 동네의 음식점들이 대개 그렇듯 보양 음식들 파는데 등산객들을 호객하는 문구들이 예사롭지 않다. 예를 들면 ‘下山必酒 無病長壽’ 라든가 말이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게스트 하우스의 야외 테라스에서는 젊은 숙박객들인 듯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생각하지도 못한 유쾌한 장면들을 만나게 되는 길이다.

봉숫골

봉숫골 풍경

그리고 바다를 접한 통영 국제 음악당. 통영 국제 음악회는 통영에 벚꽃이 화사하게 피는 3월 말에서 4월 초에 열리지만, 굳이 이때가 아니더라도 가 볼 만한 곳이다. 윤이상을 기리는 이 곳은 아름다운 외관 뿐만 아니라 좌석의 배치나 음향 시설 등이 연주를 즐길 수 있는 훌륭한 공간이니 이 곳에서 연주회를 즐기는 것도 통영 여행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계단에 앉아 이어폰으로 음악을 전해 듣는 것도 여행지에서의 여유를 즐기는 법 중 하나라고 본다.

바다를 접한 국제 음악당

바다를 접한 국제 음악당

통영에서의 먹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른 봄이 아니기에 도다리쑥국을 먹기에는 살짝 머쓱하긴 하지만 굳이 철을 따지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다. 맨밥을 손가락 길이로 김에 말아 잘 익은 석박지, 오징어 볶음과 먹는 충무 김밥이나 팥을 넣고 튀긴 통영 꿀빵 말고도 강구항 골목길 작은 식당에서 먹는 해물 뚝배기도 맛있고, 소금만 뿌려 숯불에 구워 먹는 바다 장어 구이는 담백한 맛이 일품이라 한 판을 가득 구워도 헤프게 먹게 된다. 마지막으로 통영 여행의 끝을 장식하기 위한 최고의 선택은 중앙 시장의 제철 횟감으로 먹는 회다. 포장해서 오는 동안 감칠맛나게 잘 숙성된 듬성듬성하게 막 썬 회는 봄꽃처럼 얼굴이 작은 꽃의 향기가 솔솔 나는 화이트 와인과 함께 먹기에 정말 좋다. 가는 봄을 배웅하는 듯, 내년에 올봄을 기다리는 듯한 기분이랄까?

충무 김밥

충무 김밥

어차피 봄비는 두 번이나 와 버렸고, 때문에 한창 피었던 꽃은 거의 지고 말았다. 남들은 다 가는 것 같은 꽃놀이를 못 간 것 같아 서러운 마음은 굳이 꽃을 봐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걸 핑계 삼아 일상을 벗어난 여유를 즐겨보려는 것이라는 것도 안다(사실 벚나무는 주변에 많다.). 핑계는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미덕이 있는지라 화사한 꽃놀이를 놓쳤다면 가는 봄을 쿨하게 배웅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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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화

여행 한 스푼, 와인 한 방울. 즐거운 와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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